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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쓰마측의 공작..."막부 토벌하라" 일왕 명령이 떨어졌다

[박훈의 일본사 이야기]

■한 겨울밤의 궁정 쿠데타

마지막 쇼군 요시노부 일왕에 정권반환 선언은 '실권 재장악' 속셈

반막부세력, 조정회의서 쇼군직 사퇴 등 '왕정복고 발포' 이끌어내

700년 사무라이 정권 종말 예고...요시노부 끝내 일왕에 복종 선언





조슈와 전투를 벌이는 동안 막부의 근거지인 에도와 오사카에서는 대규모 민중폭동이 일어났다. 높은 물가가 주원인이다. 또 전쟁을 지휘하기 위해 오사카성에 와 있던 쇼군 이에모치가 병사했다. 후사는 없었다. 막부는 울며 겨자 먹기로 정적 나리아키의 아들 요시노부에게 쇼군 취임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몇 달 후 요시노부가 못이기는 척하며 쇼군직을 받아들일 때까지 쇼군 공위(空位) 시기였다. 도저히 전쟁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막부는 전국이 지켜보는 가운데 처참하게 패배했다.

패배 이후 막부의 권위는 눈사태처럼 무너져내렸다. 원래 막부의 권력은 무력에서 탄생했고 정당화됐다. 세키가하라 전투(1600)와 오사카 전투(1615)에서의 승리가 그것이다. 그에 비하면 종교적·혈통적·정치적 원천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막부가 개항 이후 비등하는 압력에도 불구하고 서양과의 전쟁을 끝내 회피한 것은 국지적이라 할지라도 패전은 곧 치명상이라는 점을 알았기 때문이다. 무위(武威)의 실추, 이는 막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조슈전 패배 이후 무위로 지탱돼온 막부 권력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도쿠가와도 별거 아니구나!”

밀고 당기기 끝에 결국 쇼군직을 수락해 15대 쇼군에 취임한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이때 비장의 한 수를 던졌다. 1867년 11월9일 정권을 스스로 일왕에게 반환한 것이다. 이를 ‘대정봉환(大政奉還)’이라 한다. “신(臣) 요시노부, 삼가 황국(皇國)의 역사를 생각해보니 옛날 왕가(王家)의 기강이 흐트러져… 정권을 사무라이들이 잡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의 구습을 고쳐 정권을 조정에 반환하고 널리 천하의 공론으로 천황의 뜻을 받들어 함께 협력하여 황국을 보호한다면 분명히 해외만국과 나란히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요시노부가 국가를 위해 할 일은 이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대정봉환 상표문).” 자못 비장한 문장이다.

대정봉환 정면 /자료=위키피디아


이 한 수로 여론은 확 바뀌었다. 쇼군이 정권을 포기한 이상 그를 더 몰아붙일 명분은 없었다. 많은 다이묘가 요시노부의 결단을 환영하며 평화적 정권이양을 기대했다. 순식간에 뒤집어진 판세를 보고 조슈의 기도 다카요시는 요시노부를 가리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재림한 거 같다”며 위기감을 토로했다. 그의 눈에는 요시노부의 속셈이 보였다. 정권을 반환해 정치적 명분을 확보한 후 일왕 밑에 신정부를 구성해 실권을 장악하려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그간의 반막부운동이 허사로 돌아갈 것이었다.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조슈번이 역적으로 찍혀 교토에 올 수 없는 상태에서 사쓰마가 기민하게 움직였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군대 쪽을, 오쿠보 도시미치는 조정 공작을 맡았다. 앞서 고메이 일왕이 급사한 후 일왕이 된 무쓰히토(훗날의 메이지 일왕)는 아직 15세 소년이었다. 요시노부와 친했던 고메이 일왕이 살아 있었다면 사쓰마의 공작은 매우 힘겨웠을 것이다. 고메이 없는 조정 내에는 사쓰마 편인 이와쿠라 도모미가 버티고 있었다. 훗날 이와쿠라 사절단의 그 이와쿠라다. 신분은 비교적 낮았으나 조정의 공경답지 않게 정치력 하나만은 탁월한 사람이었다. 이와쿠라의 공작으로 막부를 토벌하라는 일왕의 명령이 비밀리에 떨어졌다. 사실은 이와쿠라와 몇몇 공경들이 만든 위칙(僞勅)이었지만.

조정은 대신들과 주요 번의 중신들을 궁궐로 불러들였다. 그들이 속속 도착하는 가운데 사이고가 이끄는 군대가 궁궐 문을 장악했다. 1868년 1월3일 열린 조정회의는 ‘왕정복고의 대호령’을 발포했다. “도쿠가와 쇼군이 지금까지 위임받았던 대정(大政)을 반환하고 쇼군직을 사퇴하겠다는 두 안건을 천황께서 이번에 단호히 받아들이셨다. 계축년(1853, 페리가 온 해) 이래 미증유의 국난이 있어 선제(先帝)께서 오랫동안 고심하신 것은 모두가 다 아는 바이다. 이에 따라 왕정복고로 국위를 만회할 기반을 세우기로 결심하시고 지금부터 섭정·관백·막부 등을 폐지하고 임시로 총재·의정·참여의 3직을 두어 만기를 행하실 것이다.” 이로써 300년 가까운 도쿠가와 시대는 끝났고 아울러 700년간의 사무라이 정권도 종말을 고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막부가 폐지된 상태에서 전 쇼군 요시노부의 지위를 어떻게 할지를 둘러싸고 격론이 벌어졌다. 막부와 가까운 인사들은 이미 대정봉환으로 일왕에 대한 충성심을 보인 쇼군 요시노부도 회의에 참석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사쓰마 측은 막부가 그간 실정을 거듭해온 죄를 물어 요시노부의 관위를 박탈하고 도쿠가와의 영지도 대폭 줄여야 한다고 맞섰다. 요시노부가 관위를 유지하고 전국 생산량의 30%를 차지하는 도쿠가와의 경제력이 건재한 한 요시노부가 신정부에서 영향력을 유지할 것은 뻔했기 때문이다. 밤이 깊어갈수록 대립은 격화됐다.



‘마지막 쇼군’이 된 도쿠가와 요시노부 /자료=위키피디아


막부에 우호적이었던 전 도사번주 야마우치 요도(山內容堂)는 회의에서 “오늘의 이 일들은 대체 무엇인가. 두세 명의 신하가 유충(幼沖)한 천자를 끼고 음모를 꾸민 게 아닌가”라고 일갈했다. 당대의 호걸다운 기개다. ‘유충’이란 나이가 어리다는 뜻이다. 15세였으니 지당한 말이다. 사쓰마와 몇몇 공경들이 있지도 않은 일왕의 뜻을 구실로 음모를 꾸민 게 아니냐는 힐문이다. 이에 이와쿠라는 “오늘의 일은 모두 천자님(일왕)의 뜻으로 행해진 것이다. 유충한 천자라니 무슨 말인가”라고 반격했다. 현실성 없는 얘기지만 감히 반박할 수 없는 명분론이다. ‘꼬마가 뭘 안다는 것이냐’고 맘속에 있는 얘기를 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회의에서는 명분론이 이긴다. 회의가 난항에 빠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사이고는 “단도 하나면 해결될 것”이라고 내뱉었다고 한다. 궁궐을 제압하는 무력은 이미 사쓰마 측이 장악하고 있었다. 결국 왕정복고 선언 이후 최초로 열린 회의는 요시노부의 관위 삭탈과 영지 감축을 결정했다. 사쓰마 측의 승리다.

그러나 그 후 정세는 묘하게 돌아갔다. 요시노부는 교토를 빠져나와 막부의 근거지인 오사카에 진을 치고 추이를 냉정하게 지켜봤다. 뒤통수는 얻어맞았지만 명분과 여론은 결코 불리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과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재림’으로 불릴 만한 영민한 정치가였다. 이미 대정봉환을 한 마당에 뜬금없이 일어난 쿠데타에 호의적이지 않은 다이묘들이 많았다. 지금부터는 그야말로 명분 싸움이었다. 사쓰마와 조슈 측은 막부가 먼저 도발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아닌 게 아니라 쿠데타를 당한 막부 신하들은 당장 교토로 쳐들어가 무도한 삿초 무리를 소탕해야 한다고 들끓고 있었다. 요시노부는 이들을 필사적으로 말렸다. 이미 일왕은 저들의 손에 있었다. 전쟁을 걸면 곧바로 ‘조적(朝敵)’이다. ‘금문의 변’으로 그 오명을 얻은 조슈번은 지금껏 중앙정계에 한발 짝도 들여놓지 못해왔다. 교토와 오사카 사이에 피 말리는 긴장이 흘렀다.

열혈분자가 저지르는 경솔한 짓, 이것이 대사를 그르친다. 1868년 1월27일 요시노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교토와 오사카 사이의 도바가도(鳥羽街道)에서 대치하고 있던 막부와 사쓰마군이 충돌했다. 이로 인해 양군의 전투가 시작됐다(도바·후시미전투). 사쓰마군은 곧바로 일왕을 상징하는 깃발을 앞세웠다. ‘우리가 관군이고 너희는 역적’이라는 것이다. 사쓰마·조슈에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요시노부에게는 절대로 피하고 싶었던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요시노부는 전투를 지휘하기는커녕 오사카를 탈출해 선박으로 에도로 가버렸다. 그리고 거기서 일왕에게 복종할 것을 선언했다. 막부의 많은 가신은 이에 불복했지만 이미 전세는 기울었다. 막부 가신들은 도쿠가와 종가의 정적이었던 나리아키의 아들 요시노부가 결국 막부를 팔아먹었다고 분개했다. 아직 막부의 군사력은 건재했다. 정치적으로도 막부는 여전히 많은 우군을 갖고 있었다. 최후로 건곤일척의 한판 승부를 걸어도 좋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쇼군 요시노부는 근신하며 복종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막부 가신들에게 그는 두고두고 욕을 먹었지만 덕분에 일본은 큰 내전 없이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메이지 정부의 수립이다.

당연하게도 신정부에는 사쓰마와 조슈 출신들이 대거 들어갔다. 그러나 다른 번 출신들도, 심지어는 막부 인사들도 능력 있는 인재라면 발탁됐다.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막부군 총사령관 에노모토 다케아키도 몇 년간의 복역 후 메이지 정부에 발탁돼 외무대신까지 지냈다. 만약 요시노부가 끝까지 항전을 고집해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전국적으로 수년간 계속됐다면 아마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메이지헌법 발표 장면 /자료=위키피디아


오늘이 연재의 마지막이다. 그간 일본 신문에서도 보기 어려운 막말(幕末) 정치사를 11회에 걸쳐 써왔다. 한국에서 이런 연재가 가능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만큼 우리 독자에게 생소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정도 이야기가 낯설지 않게 느껴질 때 한일관계도, 한국사회의 수준도 한 단계 나아질 거라는 믿음으로 열심히 써봤다. 의외로 많은 분들이 호응해주셨다. 그분들께 감사드리고 싶다.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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