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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중국 살린 타이얼좡 전투

1938년 일본군 2개여단에 완승





분노보다 깊은 절망. 국토가 유린되고 난징 대학살까지 겪은 중국인들은 분기탱천했으나 무기력은 어쩔 수 없었다. 국공합작으로 국민당군에 편입된 홍군이 핑싱관 전투에서 작은 승리를 거둔 적은 있었어도 연전연패. 다급해진 중국이 1937년 가을 화평 교섭을 타진하자 일본은 조건을 내걸었다. 내몽골 자치정부 수립, 만주국과 베이징 남방·텐진까지 비무장지대 설정, 상하이 비무장 지대 확대, 대일 관세율 대폭 인하 그리고 항일 정책 중단이라는 조건을 중국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사정은 더 나빠졌다. 무기와 정예병력의 65%를 상실한 상황. 애써 키운 공군(각종기 490여 대)과 순양함·구축함을 보유했던 해군의 전력은 개전 직후 대부분 사라졌다. 급기야 중국은 12월 초 일본의 조건을 수용하겠다며 교섭에 나섰다. 약자에게 강한 습성 탓일까. 일본은 더욱 가혹한 조건을 달았다. 만주국 승인, 일본군 점령지 전체의 비무장지대 설정과 친일 인사가 다스리는 특별행정구역 지정, 거액 전쟁 배상금 지급. 중재에 나섰던 독일조차 고개를 저었지만 일본은 ‘이것도 너무 과분한 조건’이라며 중국을 몰아세웠다.



중국의 완전 굴복을 위해 일본은 곳곳에 ‘임시정부’, ‘유신 정부’라는 미명의 괴뢰정권을 세웠다. 괴뢰정권을 맡은 친일파들의 사리사욕에 중국인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져 갔다. 패망의 공포와 무력감에 젖어들 무렵인 1938년 봄, 중국에 군사적 기적이 일어났다. 1938년 3월 24일부터 4월 7일까지 치러진 타이얼좡(台兒莊)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것. 일본군의 증강된 2개 여단(3만여 병력)은 무늬만 사단일 뿐 병력도 무기도 모자란 중국군 15개 사단 10만여 명을 맞아 참패했다. 사상자 2만 4,000여명(중국 집계, 일본 집계는 1만 1,984명).

중국군 사상자도 2만여 명에 달했으나 일본의 완패는 처음. 일본군은 지휘관끼리 공을 다투다 화를 불렀다. 일본이 한 달 뒤 타이얼좡을 점령할 만큼 중국의 승리는 일과성이었지만 보이지 않는 전략적 효과를 이끌어냈다. 패배주의가 팽배한 마당에 ‘아직 지지 않았다. 싸울 만하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일본군 20만 명으로 3개월이면 중국을 끝장낼 수 있다’던 일본은 200만 명을 투입하고도 7년 동안 수렁에 빠진 끝에 지고 말았다. 기고만장한 일본은 옛 얘기일 뿐일까. 장제스만 제거하면 친일 정권이 들어설 것으로 여겼던 전범 국가 일본과 이웃 나라를 ‘건방지다’며 비난하고 침략전쟁을 부인하는 오늘날 아베의 일본이 뭐가 다른가.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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