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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대구 서문시장





‘전라도에 풍년이 들면 대구가 부자 된다.’ 1950~1960년대 서문시장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 것이다. 그 시절에도 전라도는 우리나라의 곡창이었고 대구는 직조공장이 유명했다. 풍년으로 돈을 번 전라도 사람은 대구 서문시장에 와 옷감·이불감·혼숫감을 한 짐씩 장만했다. 평양장·강경장과 함께 전국 3대 장터로 이름난 대구 서문시장이 생긴 것은 조선 명종 때다. 처음에는 대구읍성 북문 밖에 있다가 17세기 달서문 밖으로 옮겼고 1923년 지금의 대신동으로 이전했다. 대신동에는 원래 천황당지라는 이름의 연못이 있었다. 이곳을 메워 시장 터를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객토가 필요했다. 일제는 이곳 달성 고분군의 봉분을 파헤치는 만행을 저질렀고 이곳에서 나온 흙으로 천황당지를 메웠다.

연못을 메운 데 대해 용왕님이 노해서인지 서문시장에는 유독 화재가 자주 발생했다. 1923년 이후 기록된 화재만 17번에 달할 정도였다. 1960년에는 정말 큰불이 났다. 이때는 연기가 대구시 전체를 덮어 대낮에도 한밤중처럼 깜깜했다. 이 불로 2만여명의 이재민과 43명의 부상자가 생겼다. 피해액은 46억원으로 요즘 화폐 가치로 치면 2,000억원 가까이 된다니 피해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제는 그래도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납작만두는 서문시장의 대표 음식이다. 납작만두는 먹을 것이 없던 6·25 전쟁 때 만두피에 당면 따위를 넣어 튀겨낸 음식이다. 어려울 때 먹던 서민음식인 만큼 사람에 따라 느끼는 맛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서문시장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25일부터 6일간 전체 휴장하기로 했다. 전체 휴장은 시장이 개설된 이후 처음이라고 상가연합회 측은 설명했다. 지금 대구는 코로나19 사태로 도시 기능이 마비되다시피 해 시민들이 큰 고통을 겪고 있다. 서문시장은 큰불이 날 때마다 전소 피해를 당했지만 그때마다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났다. 시장 상인과 시장에 물품을 댄 사람 간에 오랜 세월 형성된 믿음 덕분이었다. 서문시장이 다시 개점하는 날 상인은 물론 대구 시민 모두가 온 국민의 믿음과 응원 속에 감염병의 공포에서 벗어나기를 기대한다. /한기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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