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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의인] 만주로 간 8살 소녀...독립군의 어머니가 되다

■<15·끝>독립지사 허은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낙동강 자락 경북 임은동 출생

소꿉놀이 좋아하던 영특한 아이

일제 탄압에 쫓긴 아버지따라

낯선 땅 만주로 목숨 건 이주

시할아버지 이상룡 국무령 등

숱한 고초와 죽음 마주하고도

독립군복·식량 살뜰히 챙기며

끝까지 자신의 자리에서 헌신

첫 아이 낳고 몸조리할 무렵엔

독립선언서 보며 글 배우기도

노년의 허은. /사진제공=경북여성정책개발원




1990년 이상룡의 유해봉환식장에서 헌화하는 허은 여사./사진제공=경북여성정책개발원


허은 지사는 지난 2018년 광복절에 ‘대한민국의 자주독립과 국가 건립에 이바지한 공로’로 서훈을 받았다. 한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그의 삶을 비로소 국가가 인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허은의 생애를 돌이켜보면 그에게 독립운동은 일상과도 같았다. 심지어 첫애를 낳고 몸조리할 무렵 ‘독립선언서’로 글을 배울 만큼 그에게 독립이란 삶 그 자체였다.

경북 안동에 있는 독립운동가 이상룡 선생의 생가 ‘임청각’.


초대 국무령 이상룡


왕산 허위 동상


허은은 독립운동가들에게 둘러싸여 자라고 생활했다. 그렇기에 언제나 독립운동가와 함께한 것처럼 보였고, 지금도 많은 이들이 허은을 구한말 국권 회복을 위해 의병을 일으켰던 허위의 손녀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인 이상룡의 손부 정도로만 알고 있기도 하다. 그 역시 회고에서 자신의 삶에 대해 단순히 집안 전통에 따른 것처럼 그 공을 돌렸고 누구나 그럴 수 있는 당연한 삶의 방식인 것처럼 치부했다.

허은이 대표적인 독립운동 집안의 여성인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에 그는 이름 대신 이상룡의 손부로 불렸고 심지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주변의 독립운동가로 인해 독립운동에 헌신한 여성으로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다. 실제로 이상하리만치 허은의 주변에는 독립운동가들이 많았고 신기할 정도로 그 주변의 사람들은 독립운동에 헌신하였기에 그리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가 애초부터 독립운동가를 보필하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그것을 ‘운명’이라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허은의 회고에도 잘 나타나듯 그 역시 어린 시절 동네에서 사금파리를 주워 소꿉장난을 하던 지극히 평범한 여자아이였다. 글재주로 칭찬받은 사촌이 부러워 숙부의 글쓰기를 도우며 배울 기회를 만들기도 했던 영특한 아이였지만 이웃집 앵두를 따 먹다 그 집 어른에게 들키자 혼날 까 무서워 해 질 녘까지 숨어 지내던 겁 많고, 어디서든 흔히 만날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아이였다.

그가 한평생 그리던 삶은 독립운동가의 그것과 거리가 있었다. 그가 태어난 곳은 경북 임은동이었다. 임은동은 금오산 자락에 자리하고, 바로 앞에는 낙동강이 흐르는 마을이었다. 흔히 이야기하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마을이다. 허은은 임은동에서 1907년 허발의 4남매 중 외동딸로 태어나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허은은 자신의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에서 임은동 시절을 회상하며 “멀리로는 낙동강이 흘러가고 갯벌에는 갈대숲이 무성했다. 바람이 부는 날엔 온통 은빛 갈대가 꼭 춤추는 것 같은 그림 같은 곳”이었다고 기억했다. 구십 평생 언제 그런 때가 있었을까 그리워하기도 했다. 이처럼 그의 삶이 애초부터 독립운동가와 함께하도록 정해진 것이 아니었고 그런 삶을 꿈꾸며 그리던 것도 아니었다.



이것은 그의 삶에 덮여 있는 시간의 켜를 걷어내면 더욱 분명해진다. 허은은 여덟 살 어린 나이에 가족을 따라 만주로 향했다. 그의 아버지가 국권 회복 활동을 벌이자 일제의 탄압이 시작됐고 이를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떠난 길이었다. 당시 만주로 향한 모든 이들이 허은 가족처럼 어린 여자아이를 데리고 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잠시 일가친척에게 맡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만주까지 가는 길은 어린 여자아이가 감내하기에는 너무나 험난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만주까지 이주하는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도착한 후에도 그곳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풍토병 등으로 죽거나 다시 조선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경우도 허다했다. 그만큼 만주행은 건장한 성인 남성에게도 힘든 길이었다.

만주에서의 삶은 쉽지 않았다. 특히 여성에게 더욱더 힘들고 척박한 환경이었다. 당시 극심한 남녀 성비 불균형은 이러한 점을 잘 보여준다. 허은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물 한 모금 마시는 것조차 그에게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은 정수한 생수 덕분에 타지에서도 물을 별 탈 없이 마실 수 있지만 당시에는 살던 곳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물갈이’로 배탈이 났다. 주로 타지를 여행하는 이들에게 나타났기에 일명 ‘여행자 설사’라고도 불렸다. 원인은 살던 곳과 다른 타지의 풍토 때문이었다.

항생제도 없던 시절이기에 물갈이로 인한 배탈은 단순한 배탈이 아니었다. 탈수 등으로 죽을 수도 있었고 실제 많은 이들이 그렇게 목숨을 잃었다. 일본은 러일전쟁 당시 물갈이에 따른 피해가 너무 커서 설사 증상을 완화하는 지사제에 ‘러시아를 정벌’한다는 의미의 ‘정로환(征露丸)’이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였다. 그만큼 어린 여자아이가 만주에서 살아남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으니 어찌 보면 허은에게 만주로의 이주는 생명을 건 모험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는 만주로 이주하는 이들이 겪는 고난을 빠짐없이 경험했다. 만주로 향하던 중 가장 큰 고통이 음식이라고 회고록에 토로한 것이 대표적이다. 허은과 그 가족이 만주에 도착한 후에도 수인성 전염병이 돌면서 죽을 고비를 넘겼고 심지어 당시 유행하던 콜레라와 스페인 독감까지 그가 살던 곳에 불어닥쳤다. 그 역시 병에 걸려 생사의 갈림길에 있었지만 가족의 지극한 보살핌으로 겨우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그렇게 그는 만주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에게 가족은 그 어떤 이보다 중요한 존재였고 이 점은 그가 결혼한 후에도 그의 삶 속에 그대로 이어졌다.

가족과 삶에 대한 그의 의지는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는 가족을 통해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를 내면화했지만 그 의지는 단순히 가족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독립운동에 그토록 헌신하는 남편을 만류하는 것이 흔히 이야기하는 합리적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는 주변의 많은 지사가 독립운동 과정에서 고초를 겪는 것을 목도했고 죽음에까지 이르는 모습을 보면서도 자신의 의지로 그 자리를 지켰다. 어쩌면 여러 이유로 독립운동을 포기한 몇몇 독립운동가처럼 다른 선택을 하거나 심지어 다른 독립운동가를 밀고하는 이들이 부유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가족을 위해 포기하자고 자기 합리화할 수 있었고 이를 근거로 설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와 가족들은 독립전쟁 중이던 서로군정서를 비롯한 독립군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그가 만든 옷은 서로군정서 대원의 군복이 됐고 그가 만든 음식이 서로군정서 대원의 식량이 됐다. 이러한 활동은 1932년 한국에 귀국하기 전까지 계속됐다. 그에게는 독립운동 지사가 곧 가족과 같았다.

그는 다른 많은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이후 그 누구도 비난하지 않을 법도 한데 독립운동가의 집을 지켰다. 그 자리에서 그는 최선을 다해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비록 꿈꾸던 삶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끝까지 그 자리를 포기하거나 피하지 않았다.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가 자리한 곳이 곧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될 수 있었다. 독립운동의 근거지에 그가 마치 운명처럼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가 회고에 남긴 운명이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조국의 운명에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 것이었고 그 의지가 만든 자리가 바로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다. 그는 임청각의 손부 허은이 아닌, 독립지사 허은이었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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