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오늘의 경제소사] 1679년 영국 배척법 위기

현대 정치경제사의 숨은 씨앗

요크 공작 제임스 /위키피디아




1679년 11월15일 영국의회가 배척법안(Exclusion Bill)을 통과시켰다. 골자는 가톨릭교도의 국왕 즉위 금지. 국교인 성공회와 청교도 의원들은 국왕 찰스 2세(49)의 친동생 요크 공작 제임스(46·사진)의 승계를 막으려 이 법을 올렸다. 찰스 2세는 이 법을 비롯한 각종 개혁법안을 저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처음에는 의회를 통제할 힘이 충분했으나 갈수록 약해졌다. 의회에서 압도적 우위(379대139)마저 흔들렸다. 의회를 존중하던 국왕이 갈수록 노골적인 친(親)가톨릭 성향을 보이자 왕당파 의원들마저 등을 돌린 탓이다.

의회(서민원·오늘날 하원)가 ‘불온해졌다’고 판단한 국왕은 새 선거를 치렀다. 결과는 민심 이반의 확인. 522석 가운데 왕당파는 139석으로 반대파 218석에 한참 뒤졌다. 중립성향 167석도 반대파에 가까웠던 새로운 의회가 유명한 ‘인신보호율(Habeas Corpus Act)’을 통과시킨 데 이어 배척법까지 발의하자 찰스 2세는 또다시 의회를 해산시켰다. 같은 해 10월 총선에서 왕당파는 220석으로 의석을 늘렸지만 반대파는 더 많이 얻었다. 310석으로 과반의 신교 측은 원 구성 직후 배척법을 간단히 통과시켰다.



신교 의원 일부는 찰스 2세가 19세에 낳은 사생아 몬모스 공작 스콧(30세)을 옹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갈등과 대립이 극심한 가운데 찰스 2세는 귀족원(오늘날 상원)에서 배척법안을 부결시키고 1685년 죽을 때까지 의회를 열지 않았다. 왕위는 제임스가 52세의 나이로 물려받았다. 극단적 보수회귀 정책으로 그가 3년 만에 명예혁명으로 쫓겨나기까지 영국에서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꼬리를 물었다. 조카인 스콧까지 참수하며 신교의 반란을 누른 제임스 2세가 동원했던 군대가 영국 정규 상비군의 시작이다.

배척법안은 정치경제사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배척법 위기’ 속에 의회는 토리와 휘그, 양당 간 대립과 협력의 전통을 만들었다. 신교 측을 이끌던 귀족의 정치참모이자 주치의였던 존 로크는 왕권신수설에 맞서고 배척법 통과에 힘을 싣기 위해 개혁과 권력 분산, 사유재산권의 절대적 보호와 한계를 내용으로 담은 ‘정부론’을 썼다. 미국 건국과 독립선언에 이념 틀을 제공한 로크의 사상은 의회의 우위라는 오늘날 정치제도에서도 숨 쉰다. 재산권을 비롯한 현대적 권리 의식의 출발점도 로크다. 영국 왕이 배척법과 개혁을 수용했다면 어땠을까. 역사는 수구라는 역경을 뚫으려는 끈질긴 노력에 힘입어 앞으로 나아간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

서울경제 1q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