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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백남준을 만나다]"왜 일본? 한국 휘트니가 낫지" 이 한마디에…韓미술, 경계를 넘었다

<22>휘트니비엔날레 서울

휘트니미술관 관장 친분 깊던 백남준에

"첫 해외전시는 日이 적합할 듯" 말하자

"주제가 '경계선'…서울로 가자" 돌려놔

사재 25만弗 털어 '3대 비엔날레' 유치

빌 비올라 등 거물급 아티스트 한자리에

파격·진보적 전시…15만명 관람 대성공

'우물 안' 韓미술 30년 앞당긴 기폭제로

백남준(오른쪽)이 1993년7월30일 경기도 과천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 전시 개막식에서 이민섭(왼쪽 두번째) 당시 문화부 장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박수를 치고 있다.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 전시에 참여한 미국작가 재닌 안토닌(오른쪽 아래)이 개막식 행사로 ‘사람의 보살핌’이라는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머리에 물감을 묻혀 바닥에 그리는 형식이 백남준의 ‘머리를 위한 선’의 오마주로 보인다.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1993년 경기도 과천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의 포스터.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을 포함해 구겐하임과 뉴욕현대미술관(MoMA·모마), 그리고 휘트니미술관은 ‘뉴욕의 4대 뮤지엄’으로 통한다. 이 중 휘트니미술관은 철도왕 코넬리어스 밴더빌트의 손녀이자 미술가였던 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1875~1942)가 미국의 젊은 예술가들을 후원하고자 1931년에 설립했다. 원래 휘트니는 자신이 수집한 미술품 700여점을 다른 미술관에 기증하려 했으나 ‘검증되지 않은 젊은 미술가’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자 아예 새 미술관을 짓기로 했다.

소신 있게 미술관 이름도 휘트니미국미술관(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으로 붙여 신흥 강국으로 성장한 미국 문화의 자부심을 내세웠다. 유럽 미술에 비해 역사는 짧았으나 더 강렬하고 새로운 현대미술을 추구했다. 개관 이듬해인 1932년부터 작가 발굴을 목적으로 매년 두 차례씩, 회화와 조각으로 나뉜 미술제를 열었다. 1973년부터는 격년제 행사인 비엔날레로 행사를 재정비했다. 휘트니비엔날레는 이탈리아 베니스비엔날레, 브라질의 상파울루 비엔날레와 함께 20세기의 ‘세계 3대 비엔날레’로 이름을 날렸다.

이런 휘트니비엔날레가 지난 1993년 서울에서 열렸다. 이 행사가 미국 밖에서 열리기는 처음이었고 그 후에도 다시 없었다. 배경에는 백남준이 있었다.

1993년 7월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 개막식에서 당시 학예연구사였던 최태만(오른쪽에서 세 번째) 국민대 교수, 객원학예사였던 김선정(맨 왼쪽)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가 매튜 바니의 비디오 설치작품 ‘그림-억제7’을 올려다보며 설명하고 있다.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1982년 휘트니미술관이 개최한 백남준 개인전 포스터. /사진제공=휘트니미술관


휘트니미술관이 발굴한 ‘미국다운 미술’이라는 철학에는 다양하고 새로운 시도에 대한 포용성이 담겨 있었다. 동양에서 온 작가 백남준의 파격적인 퍼포먼스, 신기술의 예술인 ‘비디오아트’를 일찍이 인정한 곳이 바로 휘트니미술관인 이유다. 백남준은 이미 1977년 2월 19일부터 4월 3일까지 열린 휘트니비엔날레에 존 발데사리, 데니스 오펜하임, 아그네스 마틴 등의 작가와 함께 처음 참여했다. 이어 1981년과 83년에 연이어, 87년과 89년에 잇달아 휘트니비엔날레에 참가했다.

이 와중에 휘트니미술관은 백남준이 50세이던 1982년 4월 30일부터 6월 27일까지 그의 회고전을 개최했다. 과거 전통예술을 상징하는 바이올린을 줄에 묶어 질질 끌고 가는 백남준의 1975년 퍼포먼스 장면이 전시 포스터로 사용됐다. 1964년에 제작한 ‘로봇 K-456’를 비롯해 ‘TV부처’ ‘TV시계’ ‘하늘을 나는 물고기’ ‘달은 가장 오래된 TV’ 등 1970년대의 대표작과 당시 한창 실험 중이던 ‘레이저 비디오’ 등의 최신작까지 선보였으니 백남준의 예술세계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전시 중 하나로 꼽을 만하다.

그간 미국에서 백남준이라 하면 ‘아방가르드 페스티벌’ 등을 통해 기괴한 행동을 보인 플럭서스 출신의 악동, 샬롯 무어맨과의 나체 퍼포먼스 때문에 음란죄에 연루된 선정적이고 감각적인 인물로 평가하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당시 휘트니미술관의 개인전은 예술가 백남준에 대한 재평가의 장(場)을 열어준 결정적 계기였다. 미국의 대형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의 첫 개인전이었으니 말이다.

사실 백남준의 미국 내 첫 미술관 개인전은 1974년 뉴욕 시러큐스의 에버슨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비디오와 비디올로지’가 최초였다. 작지만 유서 깊은 미술관이라 학예연구가 탄탄했는데, 당시 백남준 전시의 큐레이터가 데이비드 로스였고 그는 나중에 휘트니미술관 관장이 된다. 1974년의 전시에서 백남준은 대표작 ‘TV정원’ 등을 발표했고 로스는 평론 글을 통해 그간의 예술세계를 정리했다. 이후 백남준이 록펠러재단의 지원금 1만 2,000달러를 받고 이를 기반으로 ‘전자초고속도로(Electronic Super-Highway)’의 아이디어를 구체화해 관련 책자도 만들 수 있었으니 로스와의 인연은 시작부터 좋았다. 로스 또한 ‘미국 내 최초의 비디오 큐레이터’로 손꼽히는 인물이 됐다.

그렇게 백남준이 ‘비디오 아트’로 미국 주류 미술계를 파고들던 무렵, 데이비드 로스가 휘트니미술관의 새 관장으로 부임했다. 1993년의 휘트니비엔날레는 로스 관장이 맡은 가장 중요한 ‘첫 미션’이었다. 그는 이 전시를 외국에 소개해 미국이 발굴한 작가를 세계에 선보이고 싶었다.

“그동안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휘트니비엔날레의 해외전시를 해보려고 합니다. 일본이 적합할 것 같아요. 문화적 수준이나 경제적 상황 등을 두루 살펴 보건대 일본 전시라면 해 볼만 해요.”



로스 관장은 마주 앉은 백남준에게 상의하듯 물었다. 순간, 백남준의 머리가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것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왜 꼭 일본이야? 일본이 아니라 한국이 낫지. 이번 전시 주제가 ‘경계선(Boderline)’이잖아.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인종·성·연령·계층에 관한 경계의 문제를 보여주는 이런 전시는 일본이 아니라 한국이 더 적합해. 한국이야, 서울로 가자.”

백남준은 로스와의 인연도 중요했지만 한국의 현대미술이 도약할 수 있는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도 않았다. 때마침 그는 유럽에서 열린 대규모 미술관 순회전이 환갑이던 1992년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으로 성공적으로 마무리됐기에 ‘고국의 고마움’ 또한 절절한 시기였다.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독일관 대표작가로 선정된 데다 황금사자상 수상이 유력한 상황이라 자신감도 높았다.

1993년 휘트니비엔날레 서울에 전시된 바이런 킴의 ‘피부색에 따른 복부 그림’


1993년 휘트니비엔날레 서울에 전시된 지미 더햄의 ‘할 말을 잊어버렸어요’


백남준은 일본으로 가려던 전시 계획을 한국으로 돌려놓았다. 늘 그렇듯 문제는 돈이다. 미술관의 해외 순회전은 수익사업이어야 한다. 운송비, 보험료 등 결과적으로는 당시 돈 9억 원이 투입됐다. 백남준은 이 전시를 위해 25만 달러의 사재를 털었다. 1992년 미국의 예술상인 세계문화예술공로자로 선정돼 받은 상금을 전액 전시 유치에 쏟아 부었다.

순조롭고 무난하지는 않았다. 전시 자체가 너무나 진보적이었다. 이미 미국에서도 상당한 파문을 던진 전시였기 때문이다. 국내 미술에 대한 투자에는 인색하면서 외국 행사에 너무 돈을 많이 들인다는 지적에서부터 ‘문화사대주의’라는 비판도 잇따랐다. 전시 개막에 참석하고 대전엑스포 출품작도 준비할 겸 백남준은 1993년 7월 하순께 잠시 귀국했다. 많은 이들이 왜 이 전시 유치에 앞장섰는지 물었다.

“뉴욕 휘트니미술관은 무명작가였던 나에게 개인전을 열어줘 오늘의 백남준을 있게 한 미술관이라 그 은혜에 보답한다는 생각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도 미국에서 가장 새롭고 첨단적인 작품들을 국내에서도 전시해 평가받아보려는 생각이 있다. 현대미술이 비디오라면 고전적인 작품 전시는 슬라이드를 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휘트니의 첫 해외전시라는 데도 의미가 있다고 본다.”

백남준이 처음 전시 개최지로 생각한 곳은 서초구 ‘예술의전당’이었다. 하지만 전시 공간이 생각보다 협소했고 비용부담이 컸다. 임영방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이 “우리가 하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건축가 김석철은 운영위원을 맡아 전시 협찬사를 물색했다. 백남준·임영방·김석철은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건립의 ‘삼총사’이기도 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쪽은 최태만, 최은주 학예연구사가 전시를 맡았다. ‘백남준 연구자’로도 명망 높은 미술평론가 이용우 전 광주비엔날레재단 대표이사가 휘트니미술관 측 코디네이터로 참여했다. 뉴욕에서 공부하고 휘트니미술관에서 인턴 큐레이터로 일했던 김선정 광주비엔날레 대표는 당시 객원학예연구사로 전시에 함께 했다. 최태만 학예사는 창원비엔날레 예술감독, 부산비엔날레 집행위원장을 거쳐 지금은 국민대 교수로 재직 중이고, 최은주 학예사는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을 거쳐 경기도미술관장에 이어 현재 대구미술관 관장이 됐다. 전시 관계자들의 현재 위상도 빛나지만 전시 자체도 이목을 끌었다. 과천관이라는 입지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15만 명이 다녀갔다.

1993년 휘트니비엔날레 서울에 전시된 게리 힐의 ‘1과 0사이’


1993년 휘트니비엔날레 서울에 전시된 키키 스미스의 ‘무제(데이빗 워나로위치와 함께)’


최태만 교수는 “당시 한국은 1980년대 민중미술을 경험한 상황이라 미국사회의 현실을 더불어 짚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고, 장르나 경향 면에서는 그래피티·카툰 등을 접할 수 있었으며 미국에 가지 않고서는 볼 수 없던 빌 비올라·게리 힐·매튜 바니 등 90년대 초반 거물급 미디어 아티스트를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기회였기에 대중은 물론 한국의 젊은 미술가들에게도 자극이 됐다”고 말했다. 이 전시는 뉴욕 미술계에서도 화제였고 한국의 문화적 위상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됐다. ‘우물 안 개구리’ 같던 한국 미술계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비엔날레’라는 생소한 용어가 일반에도 알려져 훗날 광주비엔날레가 생기는 등 한국 미술 발전의 기폭제가 됐다.

당시 휘트니비엔날레 전시작으로는 피부색을 소재로 한 바이런 킴의 작품을 비롯해 LA 폭동 등 인종 갈등을 다룬 영상물이 많았고 유색인종 페미니즘 아티스트도 대거 포함됐다. 26년 전의 논란거리는 지금도 유효하다. 앞서 간 전시였다. 그런 의미에서 백남준은, 한국미술의 미래를 앞당겨준 고마운 존재였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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