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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드골 소장, 대독항전 연설

1940년 자유 프랑스의 시작

BBC를 통해 대독항전 연설을 하는 샤를 드골.




1940년 6월18일 영국 런던 BBC스튜디오. 독일이 점령한 조국을 탈출한 프랑스군 육군 소장 샤를 드골이 마이크를 잡았다. 필리프 페탱 원수가 독일과의 휴전을 프랑스 국민에게 설득한 지 하루 만이다. 1차 세계대전의 영웅으로 프랑스인의 존경을 받던 페탱 원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쥐어뜯는 듯한 답답한 심정으로 이 전쟁을 멈춰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패탱의 부관 출신인 드골의 방송 내용은 전혀 달랐다. “프랑스는 전투에서 졌습니다. 그러나 전쟁에서는 지지 않았습니다.…(중략)…왜냐하면 이 전쟁은 세계의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자유세계가 적들을 분쇄할 승리의 순간을 프랑스는 함께 나눠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프랑스는 자유와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기 위해 모두 함께 나가 싸웁시다! 프랑스 만세!”

드골의 메시지는 그날 밤 10시에 전파를 탔다. 다음날 오후2시에 재방송된 그의 호소를 모든 프랑스 국민이 들었을까. 그렇지 않다. 아직 독일군에 점령당하지 않은 남부의 몇몇 신문들이 활자로 옮겼으나 드골의 연설이 바로 통하지는 않았다. 다음달인 7월10일, 프랑스 의회는 패탱 원수에게 모든 권력을 넘기는 헌법 개정안에 대한 표결을 472대80(기권 17)으로 통과시켰다. 훗날 ‘독일의 괴뢰정권’이라는 평을 받은 비시 정부가 출범한 것이다.



미국과 소련마저 비시 정권을 프랑스의 합법정부로 여겼다. 드골을 ‘유력 망명객’으로 인정한 것은 오로지 영국의 거국전시내각 총리인 윈스턴 처칠뿐이었다. 런던의 프랑스대사관은 드골에게 군사재판에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보냈다. 비시 정부는 궐석 재판에서 드골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혐의는 국가에 대한 반역.’

드골은 식민지 군대의 옛 상관들에게 편지를 보내 ‘독일과 싸우기만 한다면 복종하겠다’는 편지를 보냈으나 아프리카 일부 주둔군만 드골을 지지했다. 고립무원이던 드골의 심정은 ‘혼자서 아무것도 갖지 않고 헤엄쳐 대양을 건너려고 해변에 선 기분’이었다(드골 회고록). 드골이 시작한 자유프랑스의 항전은 미약하게 시작됐으나 끝은 창대했다.

국내에서 조직된 레지스탕스는 1944년 봄에 12만명, 그해 말에는 40만명 선으로 불어났다. 종전 무렵 자유프랑스군은 120만명으로 연합국 5위의 병력을 거느렸다. 프랑스는 전승국의 일원으로 대우받았다. 미래를 위해 눈앞의 안위와 타협하지 않은 드골의 연설을 역사는 가장 암울했던 순간에서 승리로 가는 위대한 전환점으로 기억한다./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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