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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워치]이렇게 기업 옥죄고도 성장 바라나
증권 정책 2020.01.21 18:15:17정부가 재계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기업경영에 국민연금이 개입할 수 있는 발판인 ‘5%룰 완화’와 상장사 사외이사 임기 제한 등을 담은 ‘반(反)기업법’ 시행을 강행했다. “유예기간이라도 달라”고 줄기차게 호소해온 상장사들은 당장 오는 3월 주주총회를 앞두고 깊은 시름에 빠졌다. 기업의 경영 자율성이 침해되면 결국 경쟁력도 잃을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관련기사 3면 정부는 21일 정부세종청사에서 국무회의를 열어 공정거래위원회·법무부·금융위원회·보건복지부가 내놓은 ‘상법·자본시장법·국민연금법 시행령 개정안’을 의결했다. 이번 개정안의 핵심은 국민연금을 포함한 기관투자가의 주주권 행사를 확대하는 ‘지분대량보유보고제(5%룰, 주식 5% 이상 보유 시 1% 이상 변동 때 5일 이내 보고)’ 완화다. 자본시장법상 5일 이내 상세보고 대상인 활동에서 △배당 관련 주주활동 △공적 연기금 등의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정관변경 추진 △회사 임원의 위법행위에 대한 상법상 권한 행사 등이 제외돼 사실상 연기금의 경영개입이 본격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또 상법상 한 회사에서 6년 이상, 같은 그룹 계열사 포함 9년 이상 사외이사로 근무한 경우 사외이사가 될 수 없다. 이번에 개정된 3개 법 시행령은 대통령 재가를 거쳐 상법·국민연금법 시행령은 공포 후 즉시, 자본시장법 시행령은 2월1일부터 시행된다. 시행령이 개정되면서 국민연금은 스튜어드십코드(기관투자가 의결권 행사 지침)를 기반으로 주주활동 강화에 적극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주총을 불과 2개월 남짓 앞둔 경영계는 위기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국민연금이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상장사는 313여곳(15일 기준)에 달한다. 30대 기업 중 1곳, 50대 기업 중 3곳을 제외하고는 모든 상장사에 5%룰이 적용된다. 당장 사외이사 교체가 필요한 기업도 556곳, 대상 사외이사는 718명에 달한다. 중견·중소기업이 여기에 주로 해당해 심각한 사외이사 구인난이 불가피해졌다. 경영계는 정부가 ‘공정경제’만을 무작정 앞세워 현실을 무시한 채 시행령을 강행했다며 반발하고 있다. 특히 기업의 경영권 방어능력 무력화, 공적 연기금을 통한 정부의 경영간섭 가능성 등을 크게 우려한다. 상장사협의회 관계자는 “그간 재계의 입장을 충분히 전달해왔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이런 결정이 내려지고 말았다”며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율과 창의를 중시하는 기업경영에 정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국민연금이 개입하는 순간 경쟁력을 상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양사록기자 sarok@@sedaily.com -
대기업 올 교체 대상 76명...'사외이사 구인난' 현실화
산업 기업 2020.01.21 17:52:23상장사 사외이사 임기를 6년(계열사 포함 9년)으로 제한하는 상법 시행령 개정안이 시행되면서 오는 3월 주주총회에서 교체해야 하는 대기업 사외이사가 76명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당장 기업들의 사외이사 구인난이 이어지고 전문성이 부족한 사외이사가 들어올 경우 이에 따른 경영차질까지 우려되고 있다. 21일 기업평가 사이트 CEO스코어가 59개 대기업집단의 264곳 상장사 사외이사 853명을 대상으로 재임 기간을 분석한 결과 올해 주총에서 물러나야 하는 사외이사는 총 76명으로 나타났다. 삼성과 SK가 각각 6명, LG·영풍·셀트리온은 각각 5명의 사외이사를 당장 새로 선임해야 한다. LS와 DB는 4명, 현대차·GS·효성·KCC는 3명의 사외이사를 바꿔야 한다. SK텔레콤·KT·삼성SDI·삼성전기·현대건설·코오롱인더스트리 등 16곳도 사외이사 2명을 3월 주총에서 교체해야 한다. 범위를 대기업에서 상장사 전체로 넓히면 ‘강제교체’ 대상 사외이사 수는 더 늘어난다. 한국상장회사협의회에 따르면 상장사들이 새로 뽑아야 하는 사외이사는 최소 566개사 718명으로 전망된다. 특히 셀트리온은 전체 사외이사 6명 중 5명을 3월 주총에서 바꿔야 하는 상황이다. 셀트리온의 김동일·이요섭·조균석·조홍희·전병훈 사외이사는 짧게는 6년, 길게는 11년 이상 재임 중인데 3월에 임기가 끝난다. 재계는 이번 상법 시행령 개정안에 대해 “기업과 주주의 인사권을 침해하는 과잉규제”라며 반발하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는 “사외이사 임기를 제한하는 상법 개정안은 외국에서 입법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과잉규제”라며 “당장 올해 주총에서 560개가 넘는 상장사들이 한꺼번에 사외이사를 교체하는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해당 기업들은 사외이사 찾기 ‘대란’에 처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기업 관계자는 “갑자기 결정된 사안이어서 후보군을 추리지 못한 게 사실”이라며 “당장 3월이 주총인데 현 사외이사처럼 회사를 잘 아는 적임자를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토로했다. 또 다른 기업 관계자는 “이사회의 일원인 사외이사를 아무나 시킬 수 없는데 인력 풀이 너무 적다”며 “전문성이 떨어지는 사외이사가 들어오면 그만큼 기업 경쟁력이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박한신기자 hspark@@sedaily.com -
'주주권 확대' 명분...국민연금 노골적 '기업 길들이기' 길터줘
증권 정책 2020.01.21 17:50:23714조원에 달하는 거대 기금을 바탕으로 300곳이 넘는 국내 기업의 지분(5% 이상)을 보유한 국민연금의 경영개입 그림자가 재계를 덮칠 태세다. 기관투자가의 ‘5%룰 완화’를 계기로 국민연금이 ‘지배구조 개선’이라는 명분 아래 본격적인 주주행동에 나설 경우 기업들로서는 경영권 방어능력이 크게 훼손될 것이라는 우려가 높다. 21일 정부가 국무회의에서 의결한 ‘상법·자본시장법·국민연금법 시행령 개정안’이 시행될 경우 기업의 자율성과 경쟁력을 갉아먹는 독소규정이 될 것이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시행령이 공포되면 국민연금이 △주주의 기본권리인 배당 관련 주주활동 △공적 연기금 등의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정관변경 추진 △회사 임원의 위법행위에 대한 상법상 권한 행사 등을 위해 투자한 기업의 지분을 늘리거나 줄일 경우 지분 변동 발생 후 5일 이내 공시해야 했던 것이 지분변동이 발생한 달의 다음달 10일 전까지 약식보고로 바뀐다. 예를 들어 국민연금이 지분 8%를 보유하고 있는 A사에 대해 감사위원회 전문성 요건 강화를 요구하는 주주제안을 사전에 공개하고 감사위원 전문성 강화를 요구하는 주주제안을 계획 중인 상황에서 1월20일 지분을 1% 이상 매각할 경우 이전까지는 ‘경영권 영향 목적’으로 1월25일까지(5일 이내) 보고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일반 투자 목적’으로 분류돼 2월10일까지 약식보고를 하면 된다. 약식보고는 일반(상세)보고와 달리 보유 목적과 지분 취득에 필요한 자금 등의 조성 내역을 명시하지 않는다. 정부는 이렇게 되면 추종 매매 등에 따른 공적 연기금의 수익률 하락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해왔지만 국민연금의 공시 부담이 줄어들게 돼 지분을 대량 보유하고 있는 기업에 대해 배당이나 지배구조 관련한 요구가 한층 거세질 가능성이 높다. 재계는 스튜어드십코드(기관투자가 의결권 행사 지침) 시행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의 적극적 개입을 심리적으로 옥죄고 있던 5%룰이 완화됨으로써 공적연금을 활용한 정부의 ‘마구잡이식 기업 지배구조 개입’이 본격화할 것으로 우려한다. 시행령에 명시된 지배구조 개선이라는 요건 역시 지나치게 추상적이어서 국민연금의 의지에 따라 결정될 수 있다는 점도 기업에는 큰 리스크다. 상장사협의회 관계자는 “배당정책 활동은 일본·미국 모두 경영권에 영향을 주는 행위로 보고 있다”며 “보편적 지배구조 개선이라는 표현은 너무 광범위해 기업으로서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인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학계에서도 이번 개정안에 무리가 될 만한 내용이 다수 포함됐다는 지적이 많다. 육태우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안이 권리남용을 통해 경영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경우까지 보고의무를 완화해주는 것은 투자자 보호와 경영권 경쟁의 공정성 확보라는 5% 룰의 입법 목적에 맞지 않다”고 말했다. 이병태 KAIST 경영대학원 교수도 “또 하나의 한국형 규제로 인해 연금사회주의적 경영권 침해가 심화될 우려가 있다”며 “제도 이전에 연기금의 운용이 정권과 독립돼야 경제의 정치화를 피할 수 있는데 현재로서는 관치경제 강화로 경제에 악영향만 미칠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민연금은 지난 15일 기준 국내 증시에 상장된 기업 중 313곳에 대해 5% 이상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시가총액 상위 30개 기업 가운데 삼성바이오로직스를 제외한 29개 기업, 50대 기업으로 넓혀도 세 곳을 제외하고는 5% 이상 지분을 갖고 있다. 시총 1위 삼성전자의 국민연금 지분율은 10.62%, SK하이닉스의 지분율은 10.24%다. 시총 3위 네이버의 경우 국민연금이 11.52%의 지분을 보유한 최대주주다. 재계는 국민연금법 개정안에 포함된 기금운용위원회 전문위원회 법제화에 대해서도 우려한다. 정부는 전문위원회로 투자정책전문위원회,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 위험관리·성과보상전문위원회 등 3개의 소위원회를 설치하도록 했으며 위원회별로 상근 전문위원 3명, 민간전문가 3명, 기금운용위원회 위원 3인으로 구성된 9명의 전문위원을 두도록 했다. 특히 이 중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는 기금운용위원회 위원 대신 민간전문가 6명으로 구성된다. 상근 전문위원은 국민연금 가입자 단체별로 한 명씩 추천받아 위촉하기로 했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상근위원을 두는 것은 매사를 꼼꼼히 들여다보는 시어머니가 들어서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피투자기업의 경영 자율성이 침해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며 “가입자단체 추천이라고 하면 기업의 목소리가 거의 반영이 안 되고 묻혀버릴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양사록기자 sarok@@sedaily.com -
과거 회생·파산도 공시...'실패한 기업인' 주홍글씨
경제 · 금융 정책 2020.01.21 17:49:49기업의 이사나 감사 등 임원을 선임할 때 후보자 정보 공개 대상을 확대하도록 한 것도 문제라는 지적이다. 대상자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할 여지가 있는데다 공직자에게나 요구될 법한 기준을 사기업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는 이유에서다. 21일 국무회의에서 통과된 상법 시행령 개정안에는 이사·감사 등 임원 선임을 위한 주주총회 개최를 공고할 때 임원 후보자의 정보 공개 범위를 확대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이전까지는 후보자와 대주주와의 관계 등 기본 정보만 공개했지만 앞으로는 법령에서 정한 임원 결격사유 여부 외에도 후보자의 체납 처분 사실, 과거 임원으로 재직한 기업이 회생 또는 파산절차를 밟은 사실을 총회 소집통지서에 기재해 주주들에게 통지해야 한다. 기업들은 반발하고 있다. 사적 영역인 기업 임원 선임까지 정부가 시행령을 통해 자격을 규정하는 것은 기업의 자율성을 해친다는 것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개인의 과거 체납 사실은 기업 경영자의 능력과 무관하고 부도난 회사에 재직했다는 이유가 경영자의 현재 자격에 문제가 될 수는 없다”며 “공직자 이상의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특히 공시를 통해 후보자의 개인정보가 공개될 경우 해당 기업이 상장폐지될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후보자 개인에게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가 되는 셈이다. 재계 관계자는 “과도한 개인정보 침해이며 인권 침해”라며 “본인은 물론 가족들도 손해를 입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성호기자 junpark@@sedaily.com -
국민연금 통해 경영권 앞박하는 노동계, 주총대란 오나
경제 · 금융 정책 2020.01.13 17:23:17오는 3월 주주총회 시즌을 앞두고 국민연금을 전면에 내세운 노동계 등 진보진영의 기업 경영권 압박 수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언급한 “스튜어드십 코드(수탁자 책임원칙) 정착” 발언에 맞춰 시행령·시행규칙 등의 제도 정비도 속전속결로 마무리되는 모양새다. 재계에서는 국민연금을 필두로 한 공적 연금 등 기관투자가의 경영권 간섭이 올해 주총 시즌을 계기로 본격화할 것으로 보고 있다. 13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참여연대와 민주노총·한국노총 등 양대 노총은 14일 국회에서 ‘문제기업에 대한 국민연금의 적극적 주주활동 방안 모색’ 토론회를 개최한다. 김남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부회장이 좌장을 맡고 양대 노총과 경제개혁연대, 국민연금연구원 관계자가 토론을 벌인다. 토론자 명단에 경영계 대표는 없고 국민연금 상급 부처인 보건복지부에서는 서기관급 실무자가 참석한다. 참여연대 등은 앞선 9일 논평을 내 삼성물산·삼성중공업·효성·대림산업 등 4곳을 ‘문제기업’으로 지목하고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를 압박했다. 이들 단체는 “국민연금은 조현준 효성 회장과 이해욱 대림산업 회장의 이사 연임 안건에 반대 의결권을 행사해야 한다”면서 정관변경과 독립 사외이사 후보 추천 주주제안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삼성 계열사 두 곳에 대해서는 주주대표 소송과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해야 한다고 했다. 일종의 선전포고인 셈이다. 재계에서는 경영권 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한진그룹(한진칼) 주총에서도 주주권 행사가 빗발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국민연금이 최근 적극적 주주활동 가이드라인을 확정하는 등 사실상 경영개입의 길을 터놓은 상태여서 당장 올해 주총 시즌부터 정관변경과 이사해임 요구 등 직접적인 경영 개입이 가능하다. 주주제안까지는 기업과 비공개 대화 등 2~3년의 기간을 뒀지만 기금운용위원회의 판단으로 이를 단축할 수 있는 독소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이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상장사는 313개, 10% 이상은 100여개에 이른다. 경제단체의 한 관계자는 “헤지펀드가 적대적 인수합병(M&A)을 할 때 써먹던 방식을 국민연금도 쓸 수 있게 되는 꼴”이라고 말했다. 이뿐 아니다. 금융위원회는 시행령 개정을 통한 5% 대량보유 공시의무(5% 룰)와 10% 이상 주주 단기매매차익 반환의무(10% 룰) 완화 조치도 올 주총 시즌부터 적용될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5% 룰 완화 조치에 따라 기관 투자자들의 정관변경과 임원 보수 등에 관한 요구는 경영권 영향 목적이 아닌 것으로 인정돼 보고 의무가 완화된다. 금융위는 완화된 조치를 내달부터 시행할 계획이다. 경영 참여 목적으로 지분 10% 이상 보유 연기금이 6개월 이내에 주식을 매매해 차익을 얻은 경우 반환하도록 한 10% 룰도 주주권 행사에 유리하게 완화된다. 기관투자가 입장에서는 적극적인 경영 간섭이 가능해진 셈이다. 금융위 관계자는 “국민연금 등 적극적 주주권 행사 수요가 있는 기관에서 내부 통제장치를 마련해 당국 승인을 받으면 올해 주총 때는 실행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재계는 강력 반발하면서도 노심초사하고 있다. 5대 그룹의 한 관계자는 “당장 국민연금이 주주권을 행사할 소지는 없다고 내부적으로 판단하고 있지만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연금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정권 입장에서 국민연금이 몇몇 ‘갑질 기업’을 손보는 게 지지층을 결집 시키는 효과가 있다”면서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불확실성에 노출된 기업이 투자에 소극적이 되는 등의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경상 대한상의 경제조사본부장은 “기업들이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에 우려가 큰 만큼 엄격한 내부 통제장치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한재영 황정원 기자 jyhan@@sedaily.com -
中 배터리 연구원 절반이 한국인…짐싸는 韓산업 두뇌
산업 기업 2019.06.20 17:35:09“중국 업체들이 현재 급여 대비 4배 정도의 연봉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경력 10년 이상의 부장급 연봉은 5억원가량 될 것입니다.” 최근 만난 전기차 배터리 업체 관계자는 중국 등 해외로의 인력 유출이 심각하다며 국내 산업 경쟁력 저하를 우려했다. 실제 반도체 산업을 비롯해 ‘포스트 반도체’라고 불리는 전기차 배터리까지 한국 인력의 해외 유출 사례가 빈번히 나타나고 있다. 최근에는 제조업 부흥을 꿈꾸는 독일과 스웨덴 같은 선진국을 비롯해 신흥국인 인도 등에서도 헤드헌팅 업체나 비즈니스용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링크드인’을 통한 인재 빼가기가 잦다. 재계에서는 인재 유출로 기술을 사실상 빼앗기는 것은 물론 미래 성장동력 확보에도 차질이 빚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대로면 가뜩이나 ‘샌드위치’ 신세인 한국 산업의 경쟁력 약화는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재계의 한 임원은 “인재 육성 외에 인재를 붙잡아둘 만한 각종 인센티브 및 정부 지원책 등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中 상위권 전기차 배터리 업체 연구개발 인력 절반이 한국인 반도체선 한해 1,300명 유출 印·獨도 韓인력 유치전 가세 원전분야는 스스로 인재 내몰아 “인센티브 등 정부 지원책 절실” ◇인재 관리 못 하는 한국…근로매력도·동기부여도 하위권=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이 매년 공개하는 두뇌유출지표에서 한국은 지난해 4.00점으로 조사대상 63개국 중 43위를 기록했다. 지난 2015년 3.98점으로 44위를 기록한 데 이어 2016년(3.94점, 46위), 2017년(3.57점, 54위)에도 50위 언저리에 그쳤다. 하위권에서 좀체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머리’가 유출되니 당연히 인재 경쟁력도 처진다. IMD의 인재경쟁력 부문에서 한국은 62.32점으로 조사대상 63개국 중 33위였다. 특히 인재 유치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근로매력도’ 부문이 41위, ‘근로자 동기부여’는 61위에 불과했다. 부실한 인재 관리 시스템에 산업 패러다임의 급변까지 겹치면서 반도체·자동차·화학·정보통신기술(ICT)·조선 등 주력 산업에서 두뇌 유출은 발등의 불이 되고 있다. 전기차 배터리만 해도 지난해 LG화학(051910)의 배터리관리시스템(BMS) 인력이 스웨덴 볼보로 이직했고 인도 타타그룹의 자회사인 타타컨설턴시서비스(TCS)나 독일의 반도체 제조 업체인 인피니온 등도 전기차 배터리 인력 입질에 나서고 있다. 그 결과 중국 내 상위권에 있는 전기차 배터리 업체 관련 연구인력의 절반이 한국 기업 출신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수년 전에는 5명가량으로 구성된 한 화학 업체의 소규모 연구팀 전체가 1년 사이 차례로 사직한 후 해외로 이직한 사례도 있다. 최근 인재 유출 등을 이유로 법적 다툼을 벌이고 있는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096770) 또한 해외로의 인재 유출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LG화학은 SK이노베이션이 지난 수년간 76명의 자사 인력을 빼갔다고 주장하지만 이들 중 25명가량이 중국 등 해외로 이직해 SK이노베이션에 남아 있는 관련 인력은 51명 수준으로 알려졌다. 반도체 업계도 사정은 비슷하다. 중국 YMTC만 해도 러브콜을 보내는 연구원이 마이크론과 같은 미국 업체부터 삼성전자(005930)나 SK하이닉스(000660), 일본의 도시바 등 국적을 가리지 않는다. 업계에서는 2017년에만 국내 반도체 인력 1,300여명이 중국으로 넘어간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일본의 일부 완성차 업체 또한 최근 자율주행차 개발 등 전장 부문의 수요가 커지면서 한국 반도체 관련 인재 영입에 적극적이다. 국내 업계 또한 인재 유출 방지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 지난해 인공지능(AI) 분야 인재 1,000명을 채용하겠다고 선언했고 학회나 포럼 관련 후원을 늘리고 있다. 최근 대기업을 중심으로 불고 있는 산학 협력 확대 또한 인재 확보를 위한 조치다. 이외에도 업체들은 인센티브용 보너스를 각 연구개발(R&D) 단계별로 차등 지급하거나 기술 유출 등에 대한 모니터링 시스템 강화 등의 방안을 시행하고 있다. 원자력 분야는 생태계가 망가질 정도다.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인재들이 무더기로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한국수력원자력·한국전력기술·한전KPS 등에서 최근 2년간 260여명이 퇴직한 것으로 알려졌다. 같은 기간 두산중공업도 80여명의 원자력 관련 인력이 퇴사했다. 이들 중 몇몇은 프랑스·미국·아랍에미리트(UAE) 등 경쟁 국가에 취업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도 인재 관리 힘 보태야=인재 관리 시스템을 국가 차원에서 구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원전 분야의 경우 편향된 정책으로 스스로 키운 인재를 밖으로 내몰고 있다는 비판마저 있다. 다른 국가는 인재 대우에 여념이 없다. 중국의 경우 2008년 중국 중앙정부 주재로 해외 유학파 고급 인재 2,000명 유치를 목표로 한 ‘천인계획’을 발표했고 실제 지난해까지 2,500명을 잡았다. 최근의 미중 무역분쟁은 마구잡이에 가까울 정도로 인재 영입에 나서고 있는 중국에 제동을 걸기 위한 것이라는 관측마저 나오는 상황이다. 일본은 학술진흥회, 독일은 훔볼트재단 등이 인재 유치에 나서는 등 선진국들은 민관 합동으로 움직이고 있다. 미국의 경우 지적재산권 지키기를 국익의 핵심으로 본다. 실제 미국 에너지부는 최근 국립연구원 소속 연구원 10만여명에게 그들의 연구가 외국 정부 프로그램과 관련이 있는지 보고하게 하고 만약 이를 어길 경우 법적 책임을 묻기로 했다. 하지만 우리는 인재 및 기술 유출과 관련한 산업계의 동향에 둔감하고 민관의 합동 대응도 허술하다. 산업계 관계자는 “2010년 이후 전체 내국인 이공계 인력 유출은 감소 추세이기는 하지만 박사급 등 현장의 핵심 고급인력 유출은 심각하다”며 “서울 지역 생활을 선호하는 인재들이 많다는 점에서 수도권 관련 규제 완화 등으로 해외로 나갈 인재를 국내에 머무르게 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밝혔다. /양철민기자 chopin@@sedaily.com -
베테랑 정년 없애고 우수 엔지니어 파격대우...핵심기업 '인재이탈 막기' 안간힘
산업 기업 2019.06.20 17:35:05국내 핵심기업들이 우수 인재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 마련에 절치부심하고 있다. 최근에는 과거 수명이 짧은 것으로 여겨졌던 엔지니어들이 회사에 오래 남아 능력을 발휘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기술 장인들에게 조직 내 기술전수 임무를 맡겨 기술 유출을 원천적으로 막고 후배 엔지니어들에게도 롤모델이 되게끔 분위기 조성에 적극적이다. SK하이닉스(000660)는 올해부터 뛰어난 엔지니어들이 정년(만 60세)을 넘어서도 일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전문성을 갖추면 만 60세 이후에도 활발하게 연구개발(R&D)·제조·분석 등에 매진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중국 등 후발주자의 노골적 인력 빼가기에 맞서 기술인력 유출을 막기 위한 대응책이다. 푸젠진화·창장메모리(YMTC) 등 중국의 반도체 기업들이 높은 연봉과 파격적인 대우로 삼성전자(005930)·SK하이닉스 엔지니어를 스카우트하고 있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엔지니어들이 이직하면 경쟁사에 노하우를 고스란히 뺏기는 만큼 SK하이닉스 등 국내 기업은 이들을 붙잡는 데 사활을 걸고 있다. 수십 년간 노하우를 쌓은 엔지니어들은 사내 젊은 기술인력을 교육하거나 반도체 장비 업체 등 협력 업체의 기술력을 높이는 가교 역할도 맡게 된다. 이들이 국내 반도체 생태계 강화에 첨병 역할을 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SK하이닉스 측은 “반도체 개발·제조 분야의 숙련된 인력에 대한 수요가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며 “오랫동안 회사 성장에 기여한 우수 기술인력들이 정년을 넘어서도 회사에서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돼 회사의 기술역량 또한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후배들 입장에서 보면 기술 배양에 평생을 바치면 결국 보상을 받는다는 인식을 갖게 돼 조직 로열티도 높아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SK하이닉스 전문성 갖추면 정년 넘어도 R&D LG전자(066570) 연구위원 선발, 차별화된 처우 삼성전자 성과있을땐 업계 최고 수준 대우 LG전자는 지난 2009년부터 우수 엔지니어를 우대하는 ‘연구위원·전문위원’제도를 운영 중이다. 이들에게는 회사에서 역량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차별화된 보상과 복리후생 혜택을 지원한다. LG전자는 올해도 심층면접·기술전문가심의회 등 엄격한 과정을 거쳐 연구위원 17명, 전문위원 4명을 선발했다. 직무의 전문성, 성과, 보유 역량의 전략적 중요도 등이 선발 기준이다. 올해는 LG전자가 전략적으로 육성하고 있는 인공지능(AI), 로봇, 자동차 부품, 모듈러 디자인 등의 분야에서 연구·전문위원이 배출됐다. 삼성전자는 ‘가장 좋은 인재 유출 방지책은 성과에 걸맞은 보상’이라는 원칙 아래 직원들을 업계 최고 수준으로 대우한다. 실제 취업 포털 사람인이 매출액 상위 30대 대기업 중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사업보고서를 제출한 28개사 직원의 지난해 평균 연봉을 분석한 결과 삼성전자는 1억1,900만원으로 정유사를 제외하고 1위에 올랐다. 삼성 관계자는 “최고의 인재들이 회사에서 자기 능력과 비전을 실현할 수 있고 그에 따른 보상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글로벌 단위에서 인재 유치 경쟁이 벌어지는 만큼 조직 문화 개선에도 주력하고 있다”고 전했다. 제조·서비스 분야에서 숙련된 엔지니어를 우대하는 제도도 시행되고 있다. 전문성을 살리고 후배를 양성하는 데 의미를 둔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삼성전자는 올해 ‘삼성명장’제도를 신설했다. 이는 기술 전문성이 요구되는 제조기술·금형·계측·설비·품질 등의 분야에서 최소 20년 이상 근무하면서 장인 수준의 숙련도와 노하우를 겸비한 직원을 최고 전문가로 인증하는 제도다. 김기남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은 “삼성 명장은 본인에게 영예일 뿐 아니라 동료와 후배들에게 롤모델로서 제조 분야 직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제도”라고 설명했다. LG전자 또한 4,000여명에 이르는 서비스 엔지니어 가운데 15명을 ‘서비스 명장’으로 선정해 예우하고 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중국 등 후발국의 기술 자립 의지가 강할수록 인재 관리도 더 꼼꼼해야 한다”며 “한중일의 경우 문화도 엇비슷해 인재 관리에 허술하면 결국 인재 유출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고 지적했다. /박효정기자 jpark@@sedaily.com -
日·濠 '도입제한' 佛·獨 '보안규정 강화'…각국은 벌써 '화웨이 지침'…혼선 최소화
국제 경제·마켓 2019.06.17 17:35:571년 넘게 이어지는 미중 무역분쟁으로 글로벌 기업들의 피해가 커지고 있지만 ‘기업이 알아서 판단할 문제’라며 최소한의 대응 가이드라인도 내놓지 못하는 한국과 달리 세계 주요국들은 미중 양국의 압박 속에서 발 빠르게 입장을 정리하고 대책 수립에 나서고 있다. 일본의 경우 정부가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의 ‘화웨이 배제’ 주문에 가장 적극적으로 호응하면서 그에 따른 기업들의 대응도 손쉬워진 측면이 있다. 일본 정부는 이미 지난해 각 부처와 자위대 등의 정보통신기기에서 화웨이 제품 사용을 사실상 배제한 상태다. KDDI 등 일본 주요 통신 업체들이 화웨이폰 판매를 중단하고 소프트뱅크가 5세대(5G) 네트워크 구축 협력사로 화웨이 대신 노키아와 에릭손을 선정한 것은 화웨이 사태에 대한 일본 정부의 확실한 노선 정리에 기반한 것으로 해석된다. 호주 역시 비슷한 시점에 통신 부문에서 안보를 이유로 화웨이 장비 사용을 대거 제한했으며 뉴질랜드도 이통사의 화웨이 장비 사용을 금지했다. 사실상 정부 차원에서 입장을 분명히 해준 것이다. 프랑스·독일의 경우 전면 배제는 아니라는 입장으로, 인가 조건 등 보안규정을 강화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 영국도 이동통신장비 핵심부품에서만 제한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화웨이 장비를 전면 배제하면 5G 네트워크 도입이 지연되는 것은 물론 막대한 추가 비용이 소요된다는 업계의 입장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다방면에 걸친 중국과의 협력관계 역시 국익 차원에서 포기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정부가 가이드라인을 내놓은 셈이다. 중국에 생산거점을 두고 미국에 수출하는 기업 비중이 높은 국가들은 자국 기업의 피해 확산을 차단할 좀 더 적극적인 대책을 내놓기도 한다. 대표적인 국가가 대만이다.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대만 정부는 생산공장을 본국으로 옮기는 ‘유턴기업’에 공장부지에 대한 토지규제 완화와 장비 구입, 연구개발 비용 전반에 대한 세금공제 등 상당한 인센티브를 추가로 제공하기로 했다. 미국이 고율 관세를 부과하는 중국산 수출품의 범위를 넓히는 상황에서 중국에 공장을 둔 자국 기업들의 관세 회피와 국내 회귀 결정을 돕기 위해 기업 지원책을 마련한 것이다. 대만은 상당수의 제조업체가 중국에 공장을 두고 있어 미중 무역전쟁의 직격탄이 예상되는 국가 중 하나다. 이러한 대응책은 이미 정부가 실행하고 있는 법인세 및 상속세율 인하 정책과 맞물려 대만 기업들의 ‘리턴’을 부추기고 있다. 세계 최대 전자제품 위탁생산 업체인 폭스콘은 대만 디스플레이공장 설립과 총 800억달러 규모의 투자를 발표했으며 대만 주요 디스플레이 기업인 한스타도 중국에서 생산하는 자동차용 중소형 액정표시장치(LCD) 물량 중 일부를 연내 대만 난커공장으로 옮길 예정이다. 일본 역시 지난 2010년 센카쿠열도 영유권을 놓고 중국과 갈등했던 ‘학습효과’로 무역전쟁 장기화에 대한 대비를 꾸준히 하고 있다. 가령 일본 정부는 신흥국에 대한 공적개발원조(ODA)를 통해 기업들의 인프라 현지 수출을 적극 지원해왔다. 유럽에서는 제조업 기반의 수출주도형 경제구조 때문에 무역전쟁의 타격을 가장 크게 받는 독일이 기업 지원에 적극 나서고 있다. 외신들에 따르면 독일은 올해 들어 기업들의 경쟁력 제고를 위해 연구개발에 대한 인센티브 지원을 추진하고 있다. 각국 중앙은행들도 무역전쟁에 따른 경기 둔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호주 중앙은행(RBA)은 이달 초 기준금리를 사상 최저 수준인 1.25%로 내렸고 인도 중앙은행(RBI) 또한 비슷한 시기에 기준금리를 5.75%로 0.25%포인트 인하했다. 이 외에 뉴질랜드·필리핀·말레이시아 등이 최근 몇 주 사이 줄줄이 금리를 내렸으며 14일에는 러시아 역시 기준금리를 기존 7.75%에서 7.5%로 인하했다. /이재유기자 0301@@sedaily.com -
[기업하기 힘든 나라]살벌한 G2전쟁터서 관군은 딴청..."민병대 홀로 싸우는 꼴"
산업 기업 2019.06.17 17:34:47요즘 LG유플러스는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이다. 4세대 이동통신(LTE)에 이어 5세대(5G) 장비도 화웨이 장비를 쓰면서 미국과 중국 양편으로부터 압박이 심하기 때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KT 등은 화웨이의 유선망 장비를, 상당수 은행은 화웨이의 중계기를 사용한다. 기업마다 이해관계가 제각각이지만 정부 차원의 조율된 ‘가이드라인’이 마련된 것도, 기업끼리 모여 논의해본 적도 없다. 업계의 한 임원은 “정부와 업계가 머리를 맞댈 상황인데도 아무 움직임이 없다”면서 “정부가 기업 입장을 꼼꼼히 수렴해 우리가 해줄 수 있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에 대한 ‘리스트업’이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니냐”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반도체 분야도 사정은 비슷하다. 미국 메모리 업체인 마이크론과 웨스턴디지털이 잇따라 화웨이와 거래를 끊으면서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반사이익이 기대된다는 분석부터 미국이 국내 기업에 선택을 강요할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반도체가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 등을 고려하면 시나리오별 국가 차원의 전략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하지만 정부는 “기업이 알아서 결정할 일”이라는 원칙론만 되뇌고 있다. 재계에서는 미중 간 고래 싸움에 로키(low key)를 유지하는 것과는 별개로 외교력을 총동원해 기업 지원에 나서야 하는 정부의 물밑 역할이 보이지 않는다는 쓴소리가 터져 나온다. ◇전쟁터서 뒷짐 진 정부…‘모든 책임은 기업이 져라(?)’=정부에는 아직 무역분쟁과 관련한 전담 조직도 부실하다. 산업통상자원부 내 통상교섭본부, 외교부 내 전략조정지원반이 있지만 기술패권, 무역수지, 국가 안보, 북한 비핵화 이슈 등이 총체적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현재의 무역분쟁을 다루기는 버겁다. 달리 말하면 기업이 전쟁터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는 뜻과도 같다. 재계의 한 임원은 “모든 책임을 기업에만 떠민 셈”이라며 “이대로면 미국으로부터 얻어낸 것은 없고 중국에서 기업 피해만 눈덩이처럼 커졌던 사드(THAAD) 사태가 재연될 가능성도 있다”고 우려했다. 사태가 최악으로 치달을 경우 국내 기업의 중국 공장은 사실상 볼모 신세가 될 수 있다. 4대 그룹 계열사만 따져도 중국에 최대 40개의 생산법인이 있다. 반도체의 경우 삼성전자가 시안에서 낸드플래시를, SK하이닉스가 우시에서 D램을 생산하고 있다. 설비는 계속 확장세다. 만약 국내 기업이 반화웨이 대열에 합류한다고 해도 반도체업의 특징상 중국 공장 운영을 해코지할 가능성은 낮다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중국 당국이 지난해 메모리 초호황 국면 때 3강(삼성·하이닉스·마이크론)에 꺼냈던 가격 담합 카드를 활용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답답한 기업들은 슬슬 움직이고 있다. 영상보안장비 업체인 한화테크윈은 최근 IP카메라에서 화웨이의 자회사 하이실리콘의 시스템온칩(SoC) 탑재율을 줄이기로 했다. 미국에 주로 수출하는 데 따른 결정이다. 문제는 미중 양국에 이권이 걸린 대다수 기업은 마음만 졸이는 형편이라는 데 있다. 재계의 한 고위관계자는 “지금 무역분쟁의 양상이 우리 정부가 말하는 ‘경제는 중국, 안보는 미국’ 식의 전략적 모호성을 갖고 접근할 단계는 지났다”며 “양국이 국가적 명운을 걸로 기술패권 다툼에 돌입한 마당에 정부가 너무 안이한 인식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다른 관계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만 해도 결국 일자리 창출을 위해 무역분쟁을 일으키는 게 아니냐”며 “그런 맥락에서 보면 (기업에 다 알아서 하라는) 우리 정부는 지금의 경제 상황에 뒤떨어지는 감각과 시대정신을 갖고 있다”고 비판했다. ◇통일된 기업 협상창구도 없고, 총체적 외교력 약해져=재계에는 민관이 같이 움직여야 하는데 민병대(기업)만 움직이는 꼴이라는 불만이 많다. 전자 업계의 한 임원은 “기업 차원에서 신냉전에 가까운 무역분쟁에 대응하기는 한계가 있다”며 “전쟁이 벌어졌는데도 정부는 딴청만 피우는 셈”이라고 말했다. 일본만 해도 정부가 일찌감치 반(反) 화웨이 전선에 합류하면서 통신장비에 이어 반도체 업종도 미국 편에 섰다. 우리와 사정이 다르기는 하지만 정부가 리더십을 발휘해 비록 단기에 기업 손실이 나더라도 확실한 가르마를 타 혼선을 줄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정부가 미중에 설명할 확실한 논리를 만들지 못한 느낌”이라며 “평소 기업에 경영간섭을 많이 해온 이번 정부가 유독 미중 무역분쟁에서는 자율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럴 때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경제단체가 기업 입장을 정리해 정부에 전하는 교섭창구가 돼야 하는데 적폐로 만들어 더 힘든 게 아닌가 싶다”며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외교 분야의 파이프라인이 부실해졌다는 진단도 나온다. 제현정 한국무역협회 통상지원단장은 “지금 같은 비상시국에는 미국과 중국의 정관계·싱크탱크 등의 유력인사에게 우리 입장을 전달해야 하는데 예전보다 더 약화된 듯싶다”며 “부정적인 영향이 나타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상훈기자 shlee@@sedaily.com -
승차공유...수도권 매립지...조선 합병...갈등 중재 역할 못하는 정부
경제 · 금융 정책 2019.06.16 17:52:13‘상생을 말하던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지난달 20일 850여개 스타트업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코리아스타트업포럼(코스포)은 이 같은 제목의 입장문을 발표했다. 택시 업계의 극심한 반대로 국내에서 승차공유 산업이 봉쇄된 상황에서 정부의 방관하는 태도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이들은 “이대로 가다가는 승차공유 업계와 택시 업계가 공멸한다”며 “정부는 더 이상 침묵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이처럼 소위 ‘밥그릇’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날로 커지고 있지만 이를 중재해야 할 정부의 모습은 사라졌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정부가 각종 갈등을 해결하기는커녕 사실상 이를 묵인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택시와 승차공유 업계의 대립이다. 지난 3월 택시·카풀 사회적 대타협 기구의 합의안이 극적으로 마련된 후 100일이 지났지만 지금까지 진행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갈등을 해결할 전제로 거론됐던 택시 월급제는 여야 간 분쟁으로 개업 휴점 상태인 국회에 멈춰 있고 기획재정부와 국토교통부 등 정부부처도 이해관계자들의 논리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다. 그 사이 논란은 카카오의 ‘카풀’ 서비스에서 또 다른 승차공유 업체인 ‘타다’로 옮겨갔다. 택시 업계는 타다를 합법적으로 만든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 시행령 제18조를 문제 삼고 있다. ‘11~15인승 승합차에 한해 운전자 알선이 허용된다’는 조항은 관광 산업을 촉진하기 위함인데 기사 수를 늘리고 사업을 확장하면 택시 업계만 규제를 받는다는 논리다. 수도권 쓰레기 매립지의 대체지를 찾는 과정에서도 정부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해당사자인 서울과 경기·인천 등 수도권 3개 시도가 조명래 환경부 장관에게 ‘공동 주체로서 함께해달라’는 건의를 했을 정도다. 12일 3개 시도 관계자는 환경부를 방문해 ‘수도권 매립지 대체지 조성을 위한 환경부의 조정·중재를 촉구하는 공동 정책 건의문’을 전달했다. 대체 매립지는 3개 시도의 2,500만 주민들이 배출하는 생활폐기물뿐만 아니라 건설·사업장 폐기물을 최종 처리하는 시설이다. 오는 2025년 이전에 대체 매립지를 조성해야 하지만 시도 간의 입장 차이와 주민반발, 정부 재정지원 등 풀어야 할 난제가 많아 후보지조차 정하지 못한 상태다. 이번 건의문 전달은 대체 매립지 조성을 3개 시도에만 맡겨둔 채 발을 빼고 있는 환경부의 ‘역할론’을 강조하는 차원인 셈이다. 실제 1989년 서울 난지도 매립장의 대체지로 인천 서구의 수도권 매립지를 조성할 때도 서울시가 대체지 확보에 어려움을 겪자 환경부가 중재자로 앞장선 바 있다.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의 합병도 정부의 수수방관에 표류하고 있다. 두 회사의 합병은 대우조선의 최대주주이자 공공기관인 산업은행이 매각주체로 사실상 정부가 추진한 건이지만 노조의 반대에 현장 실사조차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한국 경제와 조선 산업의 발전을 위해 결정된 것이므로 (대우조선 인수가) 그대로 잘 진행됐으면 좋겠다”며 “노조가 대승적으로 협력해달라”고 했지만 그뿐이다. 신세돈 숙명여대 교수는 “정부 관료들이 ‘소나기만 피하자’는 생각으로 눈치만 보고 있다”고 꼬집었다. 지난달 대중교통 대란을 초래할 뻔했던 ‘버스 노조 파업 위기’ 역시 마찬가지다. 정부가 ‘주52시간제 도입’에 따른 버스 기사의 소득 감소와 인력 부족 문제 해결을 1년 동안이나 수수방관한 탓에 발생했다는 비판이 많았다. 김소영 서울대 교수는 “경제 현안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줄이기 위해서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적정한 타협점을 찾아줘야 한다”며 “시장에만 맡겨둔다면 사회적 갈등이 오히려 커질 수 있기 때문에 정부가 어느 선에서 혁신을 허용하고 조정할지를 잘 판단해야 한다”고 설명했다./세종=정순구·한재영기자 soon9@@sedaily.com -
탈원전부서 '기피'...젊은 관료조차 논란정책은 "문제될라" 발빼
경제 · 금융 정책 2019.06.16 17:50:38정부는 최근 1세대 1주택자에 대한 양도소득세 비과세 혜택 유지 여부를 두고 국민권익위원회 ‘국민생각함’에 설문을 올렸다가 한바탕 곤욕을 치렀다. 9대1 수준으로 폐지 반대 여론이 압도적이었던데다 관련 내용에 대한 언론 취재가 시작되자 설문을 아예 중단해버렸다. 기획재정부 세제실은 “비과세 혜택 폐지를 전혀 검토하고 있지 않다”며 뒷수습에 나섰지만 민감한 정책을 두고 ‘여론 떠보기’를 했다는 거센 비판을 받았다. 해프닝으로 일단락됐지만 뒷맛은 개운치 않다. 관료 사회에 만연한 여론과 당청 눈치 보기, 책임 회피 성향이 그대로 투영됐기 때문이다. 차관을 지낸 전직 기재부 관료는 “절대적으로 옳고 그른 정책은 없다. 관료가 나름의 철학과 이유를 갖고 정책을 고민했다면 이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그런 측면에서 양도세 비과세 폐지 논란은 공직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고 말했다. ◇민간 안 만나고 책임 피하고=공직 사회의 복지부동과 여론 눈치 보기 성향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 이런 고질병은 더 악화하고 있다. 신산업 분야 규제 철폐를 둘러싼 이해관계자의 대립이 어느 때보다 극심한데다 현 정부 들어 진행된 적폐청산 작업을 직접 목격했던 터라 분위기가 꽁꽁 얼어붙어 있다. 탈원전 정책을 담당하는 산업통상자원부 에너지자원실이 ‘기피 부서’가 된 것에도 이런 분위기가 한몫했다. 논란의 소지가 있어 보이면 일단 최대한 시간을 끌어 현상 유지하는 게 최선이라는 인식이 퍼져 있다. 신사업 분야에서의 복지부동은 고질병이 된 지 오래다. 국내 첫 숙박공유 스타트업인 ‘코자자’의 조산구 대표가 지난해 10월 김동연 전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숙박공유를 둘러싼 규제를 언급하며 “가슴이 터지는 심정”이라고 했지만 여전히 도심 내 숙박공유는 외국인에만 허용돼 있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중점 육성산업으로 키우겠다고 한 바이오헬스 분야도 행정의 벽이 여전하다. 정부는 규제 샌드박스 1호 대상으로 ‘소비자 직접의뢰 유전자 검사(DTC)’를 선정하면서 ‘바이오산업의 규제 빗장을 풀었다’고 자평했지만 현장의 체감도는 싸늘하다. 건별 심사를 통해 승인받은 사업만 가능하도록 하는 포지티브 규제 방식으로는 창의적인 비즈니스 모델이 나오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경상 대한상공회의소 경제조사본부장이 지난 4월 “정부 부처에 규제 완화를 요구하면 샌드박스를 이용하라는 답이 돌아온다”며 “샌드박스가 규제 완화의 회피 창구로 쓰이고 있다”고 꼬집었을 정도다. ◇이념정책에 관료들 선택폭 줄어=‘재계의 저승사자’로 불리는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해 ‘한국판 로비스트 규정(외부인 접촉 관리)’이 생기면서 기업인들과의 소통이 완전히 단절되다시피 됐다. 로비스트 규정은 공정위 직원이 대기업 대관팀 직원이나 전관(前官) 등 외부인을 만날 경우 해당 내용을 내부 보고하도록 한 자체 규정이다. 내부에 신고를 하고 외부인을 만날 수는 있지만 혹여라도 차후 불필요한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만남 자체를 피하는 분위기다. 공정위의 한 관계자는 “같이 일했던 OB라도 민간에 있으면 만나기 불편한 게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기업의 한 대관 담당자는 “기업들 입장에서 공정위는 막강한 행정력을 가진 부처”라면서 “로비 목적이 아닌 건전한 정책 소통의 창구마저 닫힌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현 정부 들어 추진되는 대부분의 정책이 이념적 성향을 띠고 있기 때문에 관료로서는 취사선택할 수 있는 정책의 폭이 좁다”고 말했다. 경제 정책마저 이념의 틀에 포획돼 있다 보니 정책의 다양성이 제한되고 운신의 폭도 좁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일례로 대기업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투자세액공제율을 올려 감세를 해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에 기재부 관계자는 “‘대기업 증세’라는 당청의 기존 입장에 변화가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업계 사정도 모르고 “투자 고용 확대해라” 닦달=소극행정만큼이나 산업계 현실과 동떨어진 보여주기 정책 추진도 기업들을 지치게 한다. 철강업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지난 3월 경제부처 공무원으로부터 황당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광주광역시와 현대자동차그룹이 광주형 일자리 투자에 합의했듯 철강사도 지자체와 ‘○○형 일자리’를 만들 방법을 모색해보라는 취지였다. 이 관계자는 “중국이 올해 초부터 조강(組鋼) 생산량을 늘리기 시작하면서 어떻게 실적 하락을 방어할지 고민하던 차에 설비투자와 고용을 확대해달라는 정부의 요청을 듣고 당혹스러웠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무엇보다 철강산업은 소수 작업자가 공장을 오퍼레이팅(조작)하는 대표적인 장치산업이다. 작업자가 생산 라인에 달라붙어야 하는 자동차 산업과 달리 투자의 고용 효과가 크지 않다. 앞서 철강업계 관계자는 “해당 부처 공무원이 철강산업의 특성을 이해하고는 있는지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또 다른 장치산업인 석유화학 업체들도 정부로부터 비슷한 요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5대 그룹의 한 관계자는 “규제 철폐, 노동개혁 같은 국내에서 기업 할 수 있는 요인은 내버려두면서 투자와 고용을 확대하라고 주문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말했다./세종=한재영·김우보· 빈난새기자 jyhan@@sedaily.com -
한심한 행정에…전동킥보드 규제혁신 '헛바퀴'
산업 IT 2019.06.16 17:47:18전동킥보드 등 개인형 이동수단(퍼스널 모빌리티) 시장이 빠르게 커지고 있지만 막상 정부가 약속한 규제개혁은 올해 안에 실행될 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모바일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혁신 서비스는 이미 시작됐는데 느려터진 행정과 뒷짐 쥔 정치권 때문에 관련 인프라는 마련되지 못한 한심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업계에서는 관련 규정이 미비해 지금처럼 전동킥보드가 차도와 인도를 오갈 경우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안전성을 높여 시장을 더욱 활성화하기 위해 정부 당국이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16일 업계에 따르면 국토교통부는 최근 ‘개인형 이동수단 활성화 및 안전에 관한 연구’ 용역의 입찰을 진행한 뒤 단독응찰한 곳에 대해 적격성 여부를 평가하고 있다. 지난 3월 4차산업혁명위원회가 주관한 규제·제도혁신 해커톤에서 전동킥보드의 자전거도로 허용 등 주행안전기준을 제정하기로 합의한 후 3개월이 지났지만 아직 관련 연구조차 시작하지 못한 셈이다. 4차산업혁명위는 시속 25㎞ 이하 전동킥보드가 자전거도로를 주행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제품과 주행안전기준을 마련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국토부가 설정한 연구용역의 수행기간은 6개월이기 때문에 이달 중 연구에 착수한다고 하더라도 주행안전기준이 마련되고 실제 적용되는 시점은 내년 이후로 넘어간다. 당초 지난해 9월 범부처 태스크포스(TF)의 ‘현장밀착형 규제혁신 방안’에서 내건 전동킥보드의 안전기준 마련 시점은 올해 6월이었지만 반년 이상 뒤로 밀리게 됐다. 반면 퍼스널 모빌리티 시장의 빠른 확장으로 전동킥보드 판매 규모는 3년 후 최대 30만대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업계는 제도 마련이 늦어지자 답답함을 호소하고 있다. 전동킥보드의 차도 운행이 계속되면 사고가 일어날 위험이 높아져 짧은 거리를 효율적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돕는 1인 모빌리티의 장점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코리아스타트업포럼의 한 관계자는 “현재 도로교통법상 전동킥보드는 차도에서만 달려야 하기 때문에 위험성이 높다”며 “자전거도로 주행이 빨리 허용돼야 소비자들이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자전거도로 허용 시급한데...말뿐인 규제개혁에 법안까지 꽉 막혀 # 직장인 A씨는 퇴근 후 서울 강남에서 근처 약속 장소까지 전동킥보드를 타고 가던 중 사고가 날 뻔한 경험을 했다. 차도 가장자리로 전동킥보드를 몰았지만 차량 사이로 배달 오토바이가 빠르게 지나가는 와중에 전동킥보드와 부딪힐 뻔한 것이다. A씨는 “인도에서는 행인 사이를 지나가기 어렵고 차도에서는 빠르게 이동하는 차량 때문에 위협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국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퍼스널 모빌리티의 문제는 정부 당국의 늑장 행정이 혁신 서비스 확대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점이다. 허용 도로 등 관련 규정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킥보드만 늘어나면 심각한 안전사고가 발생할 수 있고 책임 소재에도 문제가 생긴다. 도로교통법과 보험업법이 그대로인 상황에서 자율주행차가 도로에 등장하는 꼴인 셈이다. 연구용역을 맡긴 국토교통부 역시 제안 배경을 통해 “개인형 이동수단은 친환경, 교통혼잡·주차 문제 완화 등의 장점이 있지만 현행 제도가 미비해 활성화에 한계가 있다”며 “관련 사고도 증가하고 있어 이용자의 안전성을 확보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고 밝혔다. 전동킥보드 운영 업체들이 가장 시급하게 생각하는 규제 개선 방안은 ‘자전거도로 주행 허용’이다. 현행 도로교통법은 전동킥보드가 원동기 장치 자전거로 분류돼 있어 차도에서만 운행이 허용되며 관련 주행기준도 없다. 하지만 시속 25㎞ 이하 전동킥보드를 차도에서 몰게 되면 위험스러운 상황이 자주 발생하며 반대로 인도에서는 보행자들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다. 실제로 전동킥보드 시장이 커지면서 사고 건수도 함께 급증하고 있다. 한국교통연구원에 따르면 지난 2016년 6만대가량이었던 전동킥보드는 오는 2022년 20만~30만대 수준으로 급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에 따라 행정안전부와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전동킥보드 사고 역시 2016년 84건에서 지난해 233건으로 늘어나고 있다. 최근에는 갑자기 튀어나오는 전동킥보드를 빗대 ‘킥라니(킥보드+고라니)’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미 싱가포르에서는 개인형 이동수단이 자전거도로를 달릴 수 있도록 허용했으며 독일도 관련 면허를 신설해 자전거도로와 차도를 주행할 수 있도록 했다. 업계에서는 제한적인 수준에서 안전을 당부하는 활동을 하고 있지만 아직 역부족인 상황이다. 전동킥보드 공유 서비스 ‘킥고잉’을 운영하는 올룰로는 이용자들에게 안전을 위해 이면도로를 이용해달라고 안내하고 있다. ‘씽씽’을 시범 운영하고 있는 피유엠피(PUMP)도 안전 캠페인 등을 진행하고 있다. PUMP 관계자는 “(주행안전기준과 관련된) 유관기관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고 밝혔다. 주행안전기준이 빨리 정립되기를 바라는 업계의 목소리와는 달리 실제 제도 마련과 시행이 언제 이뤄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국토부 관계자는 “(‘개인형 이동수단 활성화 및 안전에 관한 연구’ 용역의) 결과가 나오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연구를 바탕으로 (주행안전기준이) 마련될 수도 있고 관계부처가 조율해 법안 통과를 위해 노력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다만 법안 역시 언제 통과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이찬열 바른미래당 의원은 2월 전동킥보드 등 개인형 이동수단의 자전거도로 주행을 허용하는 내용의 ‘도로교통법’·‘자전거 이용 활성화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한 바 있다. 이 의원은 “개인형 이동수단의 자전거도로 통행을 허용하지 않아 안전하고 합리적인 이용이 보장되지 않는다”고 발의 배경을 밝혔다. 개정안은 2월 발의됐지만 현재까지 단 한 번도 논의된 적 없다. 이 밖에 제품 인증 기준 마련도 업계가 필요로 하는 개선 방안 중 하나다. 코리아스타트업포럼의 한 관계자는 “한국은 핸들·바퀴 등 따로 인증을 받아야 해 전동킥보드 스타트업 입장에서는 진입장벽이 너무 높다”며 “한국 실정에 맞는 인증 기준이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권경원기자 nahere@@sedaily.com -
前 관료들의 탄식 "조언하려 해도 전화도 안 받아..."
경제 · 금융 정책 2019.06.16 17:40:09“후배 관료들에게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아요. 기업 정책 아이디어나 조언을 해주려 해도 도통 소통이 안 돼요. 민간기업들은 오죽하겠어요.” (전직 금융관료 A씨) “마치 ‘적폐 트라우마’에 걸린 것 같습니다. 탈원전 정책을 담당하는 부서는 ‘기피 1호’ 대상이라고 해요. 차기 정권에서 책잡히지 않기 위해 몸을 너무 사려요.” (경제부처 국장 출신 B씨) ★관련기사 3면 전직 선배 관료들이 후배들의 행동과 업무태도를 유심히 지켜보면서 토해낸 탄식이다. 혁신의 지렛대가 돼야 할 공무원 사회가 몸을 바짝 숙이며 화석화되고 있다는 질책이다. 글로벌 경제전쟁의 포연은 더욱 짙어지는데 한국 관료들은 기업의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효자손이 아니라 발목을 잡는 성가신 존재가 되고 있다는 직언도 마다하지 않았다. 금융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한 전직 관료는 “정책을 밀실에서 뚝딱 만들어 통보하는 방식을 쓰고 있다. 현장과 동떨어진 이념성 정책이 양산되면서 민간과 기업으로부터 외면당하는 것은 당연지사”라고 꼬집었다. 그는 “관료사회가 잔뜩 움츠러들어 기업 담당자를 만나 애로사항을 듣는 것을 꺼린다”며 “경제가 어려울수록 민간과 소통하면서 규제를 풀어야 하는데 한숨이 나온다”고 토로했다. 승차공유, 쓰레기 매립지, 조선 구조조정이 헛바퀴 돌고 있는 가운데 네이버 데이터센터 건립마저 무산되면서 관료들의 복지부동이 위험수위를 넘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입으로는 앵무새처럼 규제 완화, 투자 활성화를 외치지만 정작 뒤에서는 기업 하기 힘든 나라를 초래하고 있다는 얘기다. 관료사회가 식물화되고 있는 것은 ‘정권이 바뀌면 신(新)적폐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장관과 차관의 결재가 없어지고 있는 것이 단적인 예다. 경제부처의 서기관급 공무원은 “기록에 남는 결재는 국·과장급이 전결 처리하고 장·차관은 구두 보고를 받는 게 일상화됐다”며 “권한과 책임의 불일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전했다. 기업들이 이에 따른 유탄을 맞고 있다. 경제부처의 한 관료는 “솔직히 기업은 불가촉 대상”이라며 “기업인을 만나면 동료들로부터 ‘기업에 물들었다’는 핀잔을 듣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세종=한재영기자·박한신 기자 jyhan@@sedaily.com <탈원전부서 ‘기피’...젊은 관료조차 논란정책은 “문제될라” 발빼> 공유경제 등 갈등소지 있으면 최대한 시간 끌어 현상유지 규제완화 책임은 안지면서 “고용·투자 늘려달라” 닦달 “오해살라” 사람 안만나...관료도 이념정책에 운신폭 좁아 정부는 최근 1세대 1주택자에 대한 양도소득세 비과세 혜택 유지 여부를 두고 국민권익위원회 ‘국민생각함’에 설문을 올렸다가 한바탕 곤욕을 치렀다. 9대1 수준으로 폐지 반대 여론이 압도적이었던데다 관련 내용에 대한 언론 취재가 시작되자 설문을 아예 중단해버렸다. 기획재정부 세제실은 “비과세 혜택 폐지를 전혀 검토하고 있지 않다”며 뒷수습에 나섰지만 민감한 정책을 두고 ‘여론 떠보기’를 했다는 거센 비판을 받았다. 해프닝으로 일단락됐지만 뒷맛은 개운치 않다. 관료 사회에 만연한 여론과 당청 눈치 보기, 책임 회피 성향이 그대로 투영됐기 때문이다. 차관을 지낸 전직 기재부 관료는 “절대적으로 옳고 그른 정책은 없다. 관료가 나름의 철학과 이유를 갖고 정책을 고민했다면 이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그런 측면에서 양도세 비과세 폐지 논란은 공직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고 말했다. ◇민간 안 만나고 책임 피하고=공직 사회의 복지부동과 여론 눈치 보기 성향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 이런 고질병은 더 악화하고 있다. 신산업 분야 규제 철폐를 둘러싼 이해관계자의 대립이 어느 때보다 극심한데다 현 정부 들어 진행된 적폐청산 작업을 직접 목격했던 터라 분위기가 꽁꽁 얼어붙어 있다. 탈원전 정책을 담당하는 산업통상자원부 에너지자원실이 ‘기피 부서’가 된 것에도 이런 분위기가 한몫했다. 논란의 소지가 있어 보이면 일단 최대한 시간을 끌어 현상 유지하는 게 최선이라는 인식이 퍼져 있다. 신사업 분야에서의 복지부동은 고질병이 된 지 오래다. 국내 첫 숙박공유 스타트업인 ‘코자자’의 조산구 대표가 지난해 10월 김동연 전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숙박공유를 둘러싼 규제를 언급하며 “가슴이 터지는 심정”이라고 했지만 여전히 도심 내 숙박공유는 외국인에만 허용돼 있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중점 육성산업으로 키우겠다고 한 바이오헬스 분야도 행정의 벽이 여전하다. 정부는 규제 샌드박스 1호 대상으로 ‘소비자 직접의뢰 유전자 검사(DTC)’를 선정하면서 ‘바이오산업의 규제 빗장을 풀었다’고 자평했지만 현장의 체감도는 싸늘하다. 건별 심사를 통해 승인받은 사업만 가능하도록 하는 포지티브 규제 방식으로는 창의적인 비즈니스 모델이 나오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경상 대한상공회의소 경제조사본부장이 지난 4월 “정부 부처에 규제 완화를 요구하면 샌드박스를 이용하라는 답이 돌아온다”며 “샌드박스가 규제 완화의 회피 창구로 쓰이고 있다”고 꼬집었을 정도다. ◇이념정책에 관료들 선택폭 줄어=‘재계의 저승사자’로 불리는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해 ‘한국판 로비스트 규정(외부인 접촉 관리)’이 생기면서 기업인들과의 소통이 완전히 단절되다시피 됐다. 로비스트 규정은 공정위 직원이 대기업 대관팀 직원이나 전관(前官) 등 외부인을 만날 경우 해당 내용을 내부 보고하도록 한 자체 규정이다. 내부에 신고를 하고 외부인을 만날 수는 있지만 혹여라도 차후 불필요한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만남 자체를 피하는 분위기다. 공정위의 한 관계자는 “같이 일했던 OB라도 민간에 있으면 만나기 불편한 게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기업의 한 대관 담당자는 “기업들 입장에서 공정위는 막강한 행정력을 가진 부처”라면서 “로비 목적이 아닌 건전한 정책 소통의 창구마저 닫힌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현 정부 들어 추진되는 대부분의 정책이 이념적 성향을 띠고 있기 때문에 관료로서는 취사선택할 수 있는 정책의 폭이 좁다”고 말했다. 경제 정책마저 이념의 틀에 포획돼 있다 보니 정책의 다양성이 제한되고 운신의 폭도 좁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일례로 대기업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투자세액공제율을 올려 감세를 해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에 기재부 관계자는 “‘대기업 증세’라는 당청의 기존 입장에 변화가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업계 사정도 모르고 “투자 고용 확대해라” 닦달=소극행정만큼이나 산업계 현실과 동떨어진 보여주기 정책 추진도 기업들을 지치게 한다. 철강업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지난 3월 경제부처 공무원으로부터 황당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광주광역시와 현대자동차그룹이 광주형 일자리 투자에 합의했듯 철강사도 지자체와 ‘○○형 일자리’를 만들 방법을 모색해보라는 취지였다. 이 관계자는 “중국이 올해 초부터 조강(組鋼) 생산량을 늘리기 시작하면서 어떻게 실적 하락을 방어할지 고민하던 차에 설비투자와 고용을 확대해달라는 정부의 요청을 듣고 당혹스러웠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무엇보다 철강산업은 소수 작업자가 공장을 오퍼레이팅(조작)하는 대표적인 장치산업이다. 작업자가 생산 라인에 달라붙어야 하는 자동차 산업과 달리 투자의 고용 효과가 크지 않다. 앞서 철강업계 관계자는 “해당 부처 공무원이 철강산업의 특성을 이해하고는 있는지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또 다른 장치산업인 석유화학 업체들도 정부로부터 비슷한 요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5대 그룹의 한 관계자는 “규제 철폐, 노동개혁 같은 국내에서 기업 할 수 있는 요인은 내버려두면서 투자와 고용을 확대하라고 주문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말했다./세종=한재영·김우보· 빈난새기자 jyhan@@sedaily.com -
모호한 배임죄 기소 日의 150배...증거 없으면 '별건수사'로 몰아
사회 사회일반 2019.06.13 17:46:18지난 2015년 12월 검찰은 이명박 정부의 자원개발비리를 겨냥해 강영원 전 한국석유공사 사장에게 1심에서 징역 7년을 구형했다. 자원개발비리 수사 ‘1호’로 떠들썩했던 강 전 사장의 혐의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죄였다. 2009년 캐나다 석유개발 업체 하베스트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독단적 결정’으로 석유공사에 5,500억원의 손해를 끼쳤다는 게 검찰의 주장이다. 그러나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경영상 판단 과정에 과오는 있지만 석유공사가 아닌 강 전 사장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1심 재판부와 항소심은 무죄 판결을 내렸다. 기업을 멍들게 한 사법당국의 ‘엿장수 마음대로’ 식 배임죄 적용에 대해 법원에서 제동이 걸리는 사례가 빈번해지고 있다. 131억원 횡령·배임 혐의로 기소된 이석채 전 KT 사장도 결국 항소심에서는 배임 혐의를 벗었다. 2,843억원을 계열사에 부당지원한 혐의(배임) 등으로 기소됐던 강덕수 전 STX그룹 회장 역시 항소심에서 집행유예 선고를 받고 풀려났다. 국내 사정기관의 ‘기업 길들이기’ 수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무한 반복되고 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무리한 배임죄 적용은 물론 기업 망신주기 식의 악의적 별건 수사가 끊이지 않아 기업 경쟁력만 죽인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배임죄 적용은 검찰의 기업 표적수사에서 대표적 기법으로 꼽힌다. 특히 횡령·배임액수가 50억원을 넘을 경우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이 적용돼 ‘무기 또는 5년 이상 징역’을 선고하게 돼 있는데 대규모 투자를 결정하는 대기업 경영진의 경우 이 기준을 넘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형선고가 사실상 사라진 점을 감안하면 살인죄(사형·무기 또는 5년 이상 징역)와 동등한 처벌 기준이라 큰 잘못이 없는 대기업을 혼쭐내는 데 배임죄만큼 유용한 게 없다는 평가다. 실제로 대검찰청에 따르면 검찰이 횡령·배임죄로 매년 기소하는 기업인은 무려 3,000~5,000명(약식기소 포함)으로 연평균 1,500건에 달한다. 우리와 비슷한 법령체계를 가진 일본에서는 매년 배임죄 기소 건수가 10건 이하에 불과하다. 우리 검찰의 기소가 150배 이상 많은 것이다. 법조계에 따르면 배임죄를 형법으로 다스리는 나라도 독일·스위스·오스트리아 등 독일계 국가와 일본 등 극소수에 불과하다. 일본의 경우 ‘명백히 손해를 가할 목적’이 있어야 처벌하는 등 엄격히 법을 적용하며 독일은 ‘경영 판단의 원칙’을 포함해 균형을 맞추고 있어 기소 건수가 매우 적다. 검찰의 무리한 배임죄 적용은 재판 단계에서 해당 혐의에 대한 무죄 선고율이 유독 높다는 사실로도 증명된다. 대법원에 따르면 지난해 1심 기준으로 일반 횡령·배임죄의 무죄율이 5.83%에 달해 2007년의 3.66%보다 2%포인트 이상 급등했다. 이는 2017년 일반 형사범죄 무죄율 평균 수치인 3.35%를 한참 웃도는 수준이다. 심지어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과 관련한 횡령·배임 혐의 무죄율은 매년 10%가 넘는다는 후문이다. 수사 성과를 확보하기 위한 검찰의 악의적 별건 수사 관행에대한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특히 최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국정농단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검찰이 별건인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분식회계 의혹 사건을 활용해 여론전을 벌이는 것이 대표 사례로 꼽힌다. 검찰은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후신인 삼성전자 사업지원TF 수장이자 이 부회장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정현호 사장을 11일 소환하면서 그가 어떤 말을 했는지까지 언론에 일일이 흘리는 행태를 보였다. 배성로 전 동양종합건설 회장이 13일 서울고등법원 형사3부(배준현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항소심에서 횡령 혐의로 1심과 같이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사건도 별건 수사의 결과다. 표면적으로는 배 전 회장의 잘못을 법원이 인정한 것으로 보이지만 당초 검찰 수사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출발했다. 검찰은 배 전 회장이 해외 현장에서 300억원 규모의 비자금을 조성해 포스코 고위층이나 이명박 정부 실세 등에 대한 로비자금으로 썼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아무런 증거가 나오지 않자 별건 수사를 벌여 기소했다. 그마저도 1·2심에서 공소사실 9개 중 8개 혐의가 무죄로 판명됐다. 2017년 ‘문재인표 방산비리 1호 수사’로 진행된 한국항공우주산업(KAI) 비리 수사는 싹쓸이 수사에도 단서가 나오지 않자 돌연 ‘경영비리’로 이름을 바꿨다. 2016년 ‘롯데 비자금 조성 의혹’ 수사는 이제 ‘롯데 경영비리’로 간판을 바꿔 재판을 받고 있다. 이 과정에서 그룹 2인자인 이인원 부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이 발생했다. 검찰 출신의 한 변호사는 “검찰은 법리적으로 혐의 증명이 어려우니까 악의적 관행을 지속하는 것”이라며 “검찰의 별건 수사에 대해 법원의 무죄 선고율은 물론 압수수색영장 기각률도 높아지고 있다”고 꼬집었다. 일각에서는 배임죄를 폐지하고 재산상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청구 수위를 높이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기업인을 배임 명목으로 형사처벌해 우리 사회가 얻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의문”이라며 “손해를 당한 사람 입장에서는 차라리 강력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통해 경제적 이득을 돌려받는 게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경환기자 ykh22@@sedaily.com -
상법, 산안법, 공정법...온통 反·反·反 '내부 싸움'에 지쳐가는 기업들
산업 기업 2019.06.13 17:45:42한국 기업들이 처한 상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내우외환’이다. 글로벌 경기침체와 미중 갈등, 보호무역주의가 ‘외환’이라면 쏟아지는 국내 규제와 반기업 조치들은 ‘내우’다. 각국 정부들이 규제 혁파와 법인세 인하 등으로 세계 무대에서 경쟁하는 자국 기업의 몸을 가볍게 해주고 있지만 한국은 정반대다. 정부와 국회·지방자치단체 가리지 않고 기업 활동에 족쇄를 채우는 조치들을 쏟아낸다. 국회에서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표를 의식한 ‘반기업’ 법안들이 속출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근로자의 처우개선을 내걸었지만 하나같이 기업 경영에 직격탄을 날리는 법안들이다. 주주와 근로자 간 상생을 통해 원활한 기업 생태계를 조성하기보다 근로자 우위의 법안을 쏟아내는 행태는 주주보다 근로자 수가 많다는 점에서 이른바 ‘표’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 이후 국회가 70여일째 ‘개점휴업’ 상태인데도 규제법안들은 계속 나오고 있다. 20대 국회 통과 여부를 떠나 내년 총선용 공적 쌓기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는 이유다. 규제정보 포털에 따르면 지금까지 20대 국회에 제출돼 계류 중인 법안은 2만108건이고 이 중 15%가 넘는 3,197건이 규제법안으로 분류된다. 당장 정부가 밀어붙이고 있는 개정안 외에도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상법 개정안만도 30건에 달한다. 공정거래법은 현재 국회에 제출된 개정안만 무려 55건으로 반기업 규제법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상법 개정안에 담긴 집중투표제 의무화는 소수주주의 권익을 제고하기보다 외국계 투기자본의 경영권 간섭 수단으로 악용될 소지가 크다는 게 재계의 주장이다. 감사위원 분리선출의 경우 경영권에 대한 직접적 위협이라는 지적이 많다. 공정거래법 개정안의 공정위 독점고발권을 검찰로 확대하는 방안도 ‘기업 옥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더해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경영상 해고를 금지하는 내용,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포괄임금제 계약 자체를 금지하는 내용이 포함된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내놓았다. 윤후덕 민주당 의원은 중견기업 이상 규모의 회사를 대상으로 하도급 대금지급 시 현금 혹은 현금성 결제수단만 사용하는 하도급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미 통과된 법 또한 문제가 많다. 지난 2015년과 지난해 각각 통과한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은 사업장의 현실을 감안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계속되고 있다. 당장 올해 말 시행되는 화관법은 유해물질 취급시설 충족 기준 항목이 79개에서 최대 413개로 늘어난다. 산안법은 법률상 규정된 책임범위(도급인의 제공·지정 및 지배·관리) 기준이 부재해 이를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자체도 반기업 조치 행렬에 동참했다. 충남도가 이미 결정하고 경북도와 전남도도 검토 중인 철강사 고로(용광로) 가동 중단 조치가 대표적이다. 충남도는 현대제철에 당진 2고로 가동을 10일간 멈추라는 행정처분을 내렸다. 경북도와 전남도도 포스코 포항·광양제철소에 대해 같은 조치를 검토하고 있다. 고로 정비 때 안전밸브를 ‘무단’으로 열어 오염물질을 불법배출했다는 게 이유지만 철강사들은 “전 세계 제철소들이 모두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항변한다. 안전밸브 개방을 대체할 기술적 방법이 없고 이 때문에 유럽 등 환경 선진국에서도 관련 규제를 찾아볼 수 없으며 개방 시 배출되는 것은 오염물질이 아닌 수증기가 대부분이라는 게 철강 업계의 설명이다. 그럼에도 지자체들이 환경단체들의 일방적 주장만 듣고 철강 산업의 핵심인 고로 가동을 중단하라는 행정처분을 내렸다는 것이다. 10일간 가동 중단으로 고로가 식으면 연속공정의 특성상 재가동에 3~6개월이 걸리고 약 8,000억원의 매출피해가 발생한다는 게 철강 업계의 분석이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다른 나라와 달리 한국은 세계에서 힘겹게 경쟁하는 기업들의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채우고 있는 셈”이라며 “기업 체력이 약해지면 경제 전체가 몸살을 앓는다는 점을 간과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송종호·박한신기자 joist1894@@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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