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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광과 보물선 침몰, 공황

금광과 보물선 침몰, 공황





1857년 9월 12일 오후 8시, 카리브해. 태풍 허리케인이 미국의 증기 범선 센트럴 아메리카(Central America)호를 끝내 삼켰다. 태풍을 만난지 둘째 날부터 몰아친 시속 165㎞의 강풍에 길이 85m, 2,141톤짜리 CA호의 돛대가 부러지고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외륜마저 작동을 멈췄다. 파도에 떠다니던 CA호는 결국 가라앉고 말았다. 캐롤라이나로부터 260㎞ 떨어진 카리브해에 CA호가 침몰했다는 소식은 미국에 충격을 안겼다. 최신 선박이었던 CA호에는 금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CA호가 적재했던 화물 대부분은 약 14t의 금괴와 금화. 1849년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에서 한몫 잡았던 투자자와 광부를 비롯한 승객 477명(선원은 101명)의 금의환향의 꿈도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이들은 왜 육로를 놔두고 위험한 해로를 택했을까. 달리 방법이 없었던 탓이다. 파나마운하(1914년 완공)는 물론, 미국 동서부를 잇는 대륙횡단철도(1869년 완공)가 가설되기 전에는 대량의 화물을 운송하려면 파나마-뉴욕 항로를 이용하는 수 밖에 없었다.

미국 동서부를 연결하는 물류 시스템은 보다 복잡했다. 1848년 한 목재소에서 대규모 금광이 발견된 이래 사람과 물자, 생산된 금의 이동이 빈번해지자 미국인들은 파나마 지협 근처에 철도를 깔았다. 뉴욕에서 배를 타고 파나마에 내려 철도를 이용한 다음 다시 배를 타고 캘리포니아로 가는 길이 가장 빨랐다.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 배를 타고 남미 대륙을 돌려면 시간도 최소한 두 달이 더 걸리는 데다 남미대륙 남단의 마젤란 해협은 거칠기로 악명이 높았다.

사고를 당하기 9일 전 파나마에서 CA호에 올랐던 승객들은 안전 항해를 믿었다. CA호는 1852년 건조된 최신 선박으로 모두 43 차례나 파나마-뉴욕 항로를 오간 선박이었다. 정부도 이 배를 신뢰해 캘리포니아의 금광에서 생산된 금을 동부로 이송하는 물량의 3분의 1을 위탁할 정도였다. 더욱이 CA 호의 선장 역시 오지 탐험가로도 명망이 높은 미 해군의 윌리엄 헌든 중령(당시 44세)이었다. 현역 해군 장교가 상선의 선장을 맡는 게 이상하지 들리지만 미국 정부가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우편선의 선장은 미 해군에게 맡겼다.

헌든 선장은 위기를 맞아 여자와 어린아이들부터 피신시켰다. 이들은 대부분 살아남았다. 헌든 선장은 마지막 승객을 구명보트에 내려놓고는 침몰하는 배에서 최후를 맞았다. 불행하게도 다수 구명정도 허리케인이 집어삼켜 승객과 선원을 합쳐 모두 578명 가운데 153명만 구조됐다. 헌든 선장은 사고 이후 침몰까지 침착함과 희생정신을 잃지 않아 모교인 미 해군사관학교에 추모비가 남아 있다.** 미국 구축함 중에도 그의 이름을 딴 배가 두 척 있었다. 헌든 선장이 ‘사랑하고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던 딸 엘렌은 훗날 21대 미국 대통령에 오를 청년 변호사 체이스 아서와 1859년 결혼했다.

CA호 침몰은 가족을 잃은 사람 뿐 아니라 미국 경제 전체에 상처를 안겼다. 배에 실렸던 14t의 금은 경제 위기를 진정시킬 자금이었기 때문이다. 굴지의 금융회사인 뉴욕 오하이오생명보험사 직원의 횡령으로 불거진 경제 위기의 확산을 막을 돈이 CA호에 실려 있었다. 결국 미국에서 수습되지 못한 위기는 바다를 건너 영국과 프랑스, 오스트리아, 독일까지 퍼졌다. 세계는 소비 둔화와 생산 격감을 동시에 겪었다. 산업과 무역, 증기선과 전신은 한 나라에서 그치던 경제 위기를 세계로 퍼트렸다.



고 찰스 킨들버거 교수(1910~2003)는 명저 ‘광기, 패닉, 붕괴-금융 위기의 역사’에서 ‘1857년의 공황은 인류가 동시에 경험한 최초의 세계적인 공황’이라고 단언하며 지구촌 경제가 이때부터 잊을만하면 다시 피어나는 다년생 잡초인 공황에 구조적으로 빠져들었다고 진단한다. CA호 침몰 당해년도에 뉴욕 증시의 주가가 3분의 1토막 나고 기업 6,000개가 도산하는 홍역을 앓았던 미국은 1861년 남북전쟁으로 인한 전쟁 특수를 만나고야 경제 위기를 완전히 벗어났다.

사람들은 CA호의 금을 찾으려 애썼지만 침몰 만 130년이 지난 뒤에야 해양기술자 톰슨이 심해 로봇을 활용해 일부를 건져냈다. 톰슨은 보험사 간 법정다툼 끝에 97%에 대한 권리를 인정 받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본을 모아 발굴을 시도해 적지 않은 성과를 올렸어도 약 10억 달러 이상의 유물이 해저의 CA호에서 잠자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앞으로도 발굴 시도와 건져 올린 금을 둘러싼 분쟁은 그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사고 당시 카리브해의 바다에 빠져 죽은 사람들 중에는 캘리포니아에서 어렵게 모은 금을 끝까지 포기하지 못했던 경우가 많았다. 미국을 여행 중이던 영국 작가 존 러스킨이 이 소식을 듣고 남긴 말이 있다. ‘금을 포기하지 못해 금과 함께 바다 깊숙이 가라앉았다면 인간이 금을 소유했을까. 아니면 금이 인간을 소유한 것일까.’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미국인들이 열대 과일 바나나를 접하게 된 계기도 ‘뉴욕-대서양-파나마(철도)-태평양-샌프란시스코’ 항로와 관계가 깊다. 뉴욕에서 파마나까지 승객과 화물을 실어나른 배가 빈 채로 다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아 선주들이 대체 화물로 찾은 게 바로 중남미 일대에서 자라는 바나나였다. 캘리포니아의 금광 발견이 과일의 지구화까지 촉진한 셈이다.

** 미 해군사관학교에 세워진 그의 추모비에는 신입생마다 먼저 오르려는 경쟁이 벌어진다고 한다. 헌든의 추모비 꼭대기를 먼저 만지면 가장 먼저 별을 달 수 있다는 소문 때문이라고. 간혹 인터넷에는 ‘CA호를 살릴 수 있을만큼 구조선이 왔는데도 선장이 판단을 잘못해 놓치고 말았다’는 내용이 떠돈다. 성경 구절까지 곁들인 어떤 성직자의 설교가 퍼진 것으로 보이는 데 근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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